요리단상

몇달전부터 웬만한 맛집 / 미식가 블로그에 꼭꼭 등장한 정식당이라는 곳이 있었다. 한마디로 한식의 맛을 전혀 새로운 식감과 비쥬얼로 변신해 내놓는 "New Korean"이라는 쿠진을 선보이는 곳이다. 

이곳도 파인 다이닝을 주도하고 있는 Gastronomy(Gastronomy 자체는 좀 더 넓은 의미의 미식, 문화와 음식에 대한 연구를 총칭하는 용어) 문화에 기반한, 즉 분자요리인데, 사실 난 여러 블로그들을 보면서 Gastronomy 이런 레스토랑들이 내놓는 음식들에 엄청난 기대가 가면서도 과연 이것이 정말 맛있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샐러리와 흑미라던지, 가리비와 오미자 등의 조합과 음식보다 미술작품에 가까운 비주얼은 그 맛이 상상이 되지 않았고, 당일에도 2%의 의심을 품고 정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코스는 4만원과 7만원으로 두가지가 있었는데, 4만원짜리 코스를 택했다. 여기에 10% 택스 추가.

첫 타자는 머루젤리와 푸아그라 무스. 그리고 청양고추 바게트와 크렌베리로 추정되는 달달한 얇고 바삭한 빵이 함께 서빙되었다. 달달한 빵과의 조화가 좋았으며, 개인적으로 푸아그라의 사육과정 때문에 먹을 때 100% 마음이 편하지는 않으나, 녹진한 푸아그라와 상큼한 머루의 조합은 좋았음. 그러나 제일 감동은 청양고추 바게트. 예전 Hyatt 호텔 부페에서 먹은 미니바게트 만큼의 감동이었다. 겉은 바사삭하고 안은 뽀송하고 고소하고. 거기다가 청양고추가 아주 잘게 다져서 들어가 있는데, 그 겉돌지 않고 잘 어울리는 조합히 심히 놀라웠으며, 절대 오버스럽지 않은 매운맛, 그렇지만 은은하게 입안에 계속 맴도는 알싸한 매운맛이 매우 즐거웠다. 철저하게 계산된 듯한 이 조합과 매운 정도에 이미 다른 요리들에 대한 기대감이 확 올라갔다.

그 다음 나의 코스였던 해산물 샐러드. 내 앞에 놓여졌을 때의 그 비쥬얼 감동은 생생하다. 저온건조한 메추리알 노른자, 페타치즈, 멜론류(참외였으려나), 그리고 바닥에는 라임젤리. 옆은 자몽거품과 아이올리소스에 버무린 가리비(또 다른 해물류도 있었음). 무슨 맛인지 전혀 상상이 안 감.


나에게는 이 디쉬가 그날 최고의 쇼크였다. 제일 놀라웠던 것은 이파리 한입, 새끼손톱만한 치즈, 소스 한 방울이 너무나 강렬하고 생생한 맛을 뿜어냈다는 것. 특히 저 초록색 소스는 샐러드 야채로 자주 등장하는 arugula를 쓴 것 같은데 무슨 농축엑기스 폭탄이 입안에서 터지는 듯한 정도의 강렬함이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극강으로 끌어올린다는 게 이런거구나 싶었음. 먹고 한참 정신놓고 있었다. 

그 다음은 밥/면류 삼총사. 보리된장 리조또와 시금치 볶음밥, 그리고 청양고추 수제비  세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세명이었으므로 한가지씩! 요것들도 다 맛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마일드한 느낌으로 약간 쉬어가는 느낌.

보리 된장 리조또. 가운데 동글동글한 하얀 녀석들은 무엇일까요?
무려 깍두기. 정말 알싸하게 매운 맛이 난다.

이건 시금치 볶음밥. 역시 깍두기와.

이건 내가 시킨 청양고추 수제비. 베이컨의 고소함과 크런치가 지나가면 크리미한 소스가 느껴지고 그후 치고 올라오는 역시 정제된, 그러나 확실한 매운맛. 거기다가 완~전 쫄깃한 치자반죽 수제비. 

이 쯤 먹고나니 메인이 너무너무 기다려졌다. 도대체 뭐가 나올 것인가.

그리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브리오슈로 감싼 연어. 그리고 몇가지 야채/과일 다이스와 망고 소스. 이것도 역시 다양한 맛이 너무 조화롭게, 그러나 각각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일단 드셔보시길.

너무나 아름다운 비주얼의 이 디쉬의 이름은 '보물섬'. 가자미와 각종 야채, 그리고 조개국물. 맛의 조화는 좋았으나 식감면에서 생선이 약간 더 부드러웠으면 어떨까 싶었다.

이 날 세명 모두의 찬사를 얻은 메인인 '오감만족 돼지보쌈'. 참 재밌는 이름. 정말 한폭의 그림같다고!
바삭쫄깃부드러운 돼지고기와 달달하고 부드러운 양파? 소스와 고추가 잘 어울려 완벽한 한 입을 만들어냄. 강추메뉴.

이제 디저트가 나올 차례. 메인들은 너무나 맛있었는데 디저트가 약한 것보다 더 큰 실망은 없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한정식집에서 화려한 코스 후 참외와 수박한쪽, 마트서 파는 매실주스 한 잔 내오는 것. 그렇지만 이곳은 디저트를 기대하지 않을수가...

이것은 수정과 맛이 나는 무스/젤리/스펀지케익 조합. 왕신기. 계피향이 강하지도 않고 딱 적당. 아래는 무려 당귀 아이스크림인데 쌉싸르한 맛이 바닐라와 매우 잘 어울렸다.

이것은 팥빙수를 접시위로 옮겨놓은 디저트. 밀크 아이스크림에 올려진 저 쿠키 너무 맛있었으며 녹차무스와 밤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맛있게 먹은 디저트이나 재료 자체의 맛을 끌어내고 조합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음식의 맛을 만들어낸 것이라 다른 음식보다는 감흥은 약간 덜함. 수정과에 한 표. 봉에보에서 먹은 엄청난 감동의 토마토 샤베트 같은 디저트가 좀 더 내 취향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흐름에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 그리고 디저트 먹기전에 빵조각 등 테이블 깨끗이 한 번 치워주는 서비스, 매우 간단한데 의외로 안해주는 식당이 참 많으나 정식당은 역시 박박 긁어(?) 깨끗하게 치워줘서 흐뭇했음.

마지막으로 차 혹은 커피와 쑥 피낭시에가 나오는데...이 귀여운 것들 정말 대단했다. 폭신하면서도 쫄깃하고 상큼하고 달달하고 부드러운. 정말 한무데기로 사오고 싶었다.

여기까지가 점심코스. 한국에서 최고의 dining experience였으며 가격대비 너무 만족스럽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식감, 온도, 맛의 조화 등 모든 것들이 100% 완벽하게 계획되고 접시 위에 그대로 실현되어 나오는데, 내가 음식 한 접시를 먹고 있다, 이런 느낌은 좀 덜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제된 완벽함과 섬세함이 끌어내는 미각경험의 정점. 왜 분자요리가 이렇토록 각광을 받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식사였다.

여담으로, 블로그들을 읽다보면 정식당 관련해 한식의 진정한 세계화가 뭐니 New Korean이란 이름이 적합하지 않다니 말들이 있는데, 요리는 결국 Anthony Bourdain이 말한 것 처럼 Pleasure Business, 쾌감을 위한 것 아닌가. 어떤 요리법이던, 재료던, 다양하게 조합하고 창조해서 먹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놀라움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훌륭한 요리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한식에서 쓰이는 다양한 맛의 조합에서 영감을 얻고 신선한 비주얼과 식감을 부여해 한식에 익숙한 한국인들도 새롭게 먹어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는 데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도산공원 근처에 위치한 이곳의 더 자세한 정보는 윙버스 링크에서 확인해 보시길. (02) 517-4654로 예약은 필수. 일요일 휴무라 들었는데 블로그 보다보면 가신 분도 계신 듯? 여튼 확인 요망.

ps. 얼른 돈 모아서 이제 저녁코스 도전해야지. -ㅅ-
pps. 정식당의 로고는 올리브 가지와 냉이.
<출처 - http://blog.naver.com/powerfilm>
요새 부모님이랑 얘기할 때마다 요리요리요리요리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집에 오니 어머니가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작은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다. 꺼내어 보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쯤 그렸던 레시피 만화였다. 한장한장 넘겨보면서 마구 오그라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정말 어릴때부터 이걸 좋아했었구나, 라는 안도감과 희열이 느껴지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끼워맞추는 걸수도 있겠지만, 요새 한창 꿈과 현실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였는데, 근래 제일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되었던 듯 싶다. 

여튼, 너무나 웃겨서 스캔해 공유해 드린다. 고구마치즈튀김 레시피 카툰 즐감상!


그런데 이 정체불명의 레시피는 도대체 어디서 본거지? 
and thanks to mom :)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포스터. 출처 : http://layoutsparks.com>

날이 점점 더워지던 어느 초여름날 주말 저녁. 느지막히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거리를 생각하며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느때처럼 그득한 한상차림이 되버려 마침 문자를 주고 받던 동네친구녀석을 불렀다.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친구의 손에는 화이트 와인이 한 병 들려있었다.

"웬 와인? 뭐냐?"
"아 이거 저번 와인세일때 만원 주고 산건데...아르헨티나 산이던가."

뭐야, 저가 신대륙 와인이잖아. 시큰둥한 표정으로 병을 건네받아 코르크를 따려고 보니 무려 돌려따는 스크류탑이 아닌가. 풋, 뭐 대충 파스타랑 먹긴 나쁘지 않겠군. 막(아무거나따라마시는)잔을 꺼내 두 잔을 넉넉히 따랐다. 

"역시 와인은 유럽이랑 미국쪽이 좋은 거 같아."
"그래도 싼 값에 마시는 게 있잖아. 자 짠!"

아무 생각 없이 잔을 입에 갔다대었는데 어라, 냄새가 향기롭다. 한모금을 벌컥 마시니 새콤상콤 향기롭게 은은하게 이어지는 맛.

언제부터 와인이 이리 좋아졌나. 분명히 요 애기만할때는 냄새만 맡고도 웩! 거렸는데
(그나저나 얘는 누구지......)
<출처 - http://www.gamitian.com>

한병을 싹 비우고 알딸딸하니 앉아있는데, 아까 원산지랑 가격, 코르크만 보고 피식거렸던 내 자신이 참 우스웠다. 언제부터 얼마나 와인에 대해 잘 안다고 그런 편견들이 생긴건지. 아니, 어쩌면 아는 것이 오히려 없고 어느정도 마셔봤다, 라는데서 오는 오만까지 겹쳐 와인에 대한 정직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 대신 편견만 굳혀왔구나, 싶었다.

와인병을 갖다가 다시 찬찬히 보고 있는데, 문득 뉴욕에서 만났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뉴욕에서 이벤트 플래닝 인턴쉽을 하고 있을 무렵, 우리 팀에 제시카라는 이름의 또 한명의 인턴이 들어왔다. 나보다 나이는 조금 더 많아 보이고, 학력은 전문대 중퇴에 인상은 금발에 소위 완전노는애, 옷도 좀 촌스러운 야시시한 스타일. 난 그 여자를 '그러그러한' 부류로 확 찍어버리고 처음부터 오만과 편견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스타일. 내 블로그 정지먹진 않겠지 -ㅅ-
<출처 - http://s.bebo.com>

우리가 세달을 꼬박 일한 큰 펀드레이저가 열리던 당일, 해당모금의 수혜를 받는 몇명의 지체장애인들이 초대가 되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난 좀 불편해졌고 어떻게 그들을 '다뤄야' 할지 몰라 그냥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그 때 제시카가 도착했다. 휴,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 

그런데 제시카는 그 장애인들을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너무나 환한 미소로 그들을 대하고 저녁을 챙겨주며 조곤조곤 성심성의껏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그녀와 너무 친해져 있었으며 마지막에 헤어질때는 진심어린 포옹과 함께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찬찬히 "Thank you, Jessica"라고 인사를 했다.

그 때 내가 느낀 창피함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녀를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으며, 겉모습과 조건만으로 확고한 편견을 가진 것, 내가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고상한' 옷차림이라 해서 오만을 품은 것에 대해 크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 나는 그녀와 아직도 연락하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던, 처음 보는 와인을 접하던, 겉으로 보이는 라벨과 조건에 막혀 그에 대해 제대로 알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던 것은 아닌지. 그 후 새로운 와인을 접할 때면 그 날 저녁이 생각나 겸허해진다. 필요이상 잔돌리기, 마실때 므흣한 표정짓기, 고상한 포즈 취해주기 등 와인마시면서 들었던 부르주아 겉멋들도 버리고.

그래도 가끔은? 으흐흐...
<출처 - http://www.seriouseats.com>

결국 와인은 술이다. 그 깊은 역사와 장인정신, 다양한 버라이어티가 맛보고 공부하기에 너무나도 흥미로운 토픽이지만, 와인 관련해 가장 즐거운 기억은 대학교 마지막 학년에 매주말 친구들과 왁자지껄 모여 이것저것 맛을 보고, 마치 우리가 와인에 대해서 잘 아는양 한껏 떠들어대다 결국엔 겔겔 취해서 다음날 베트남 쌀국수로 같이 해장하던 기억. 영화 Sideways를 보면서 고상함과 오만을 떨어대는 코믹한 주인공들을 보며 놀려대던 기억. 그런 기억들이지 않나 싶다.

영화 Sideways의 한 장면. 무려 껌 씹으며 와인테이스팅을 아하하.
<출처 - http://static.guim.co.uk/>

ps. 나중에 알게 된 아르헨티나 대표 품종인 Torrontes란 그 와인은 그 후 나의 사랑을 듬뿍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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