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플레이팅은 어렵다.

JWU 생활 l 2012. 1. 11. 14:19
존슨앤웨일즈에서는 한번에 수업을 하나씩 듣는다. 각 수업은 9일씩 매일 7시간. 내가 이수하려는 프로그램은 총 15개의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현재 7개 완료. 

오늘 Nutrition 마지막 수업은 미스터리 바스켓 형식으로 진행. 제비뽑기로 그날의 프로틴을 결정한 후 요이땅, 1시간 반 이내로 모든 작업 완료. 사실 어제 재료주문하는 셰프의 통화내용을 얼추 들어서 대강 아이디어는 짜 놨는데, 그러면 그렇지, 예상에 없었던 대합과 홍합이 걸렸다. ㅋㅋ

개학한지 얼마 안되서 재료들도 부족하고, 수업 마지막 날이라 재료를 처분하는 것이 1차목적이기 때문에 새들새들한 야채들이 냉장고에 한가득 -_- 도저히 모양과 파릇함을 살릴 수 있는 녀석들이 없어 다지고 채썰고 볶고 튀기고...

아마 이 플레이팅은 여태까지 중 머릿속의 비주얼과 실제 접시 모냥새가 가장 일치한 과제가 아닌가 싶다. 당연히 아직 디자인이나 전체적인 흐름이야 아마추어스럽지만 생각한 이미지를 실행시키는 능력은 조오오오금씩 향상중. 그리고 음식 온도유지, 소스와 가니쉬의 역할, 안정감에 대한 자잘한 팁들을 거의 매일 하나씩 배우고 있다. 이건 나중에 한번 정리해서 올릴 예정.



여튼 전체적인 맛의 밸런스와 조화도 꽤 만족스러웠다. 토마토와 약간의 고추씨로 향을 낸 리조또를 깔고 양파/당근/샐러리/마늘과 화이트와인으로 쪄낸 홍합/대합을 올림. 그리고 부추레몬크림을 두르고 양파/당근/샐러리/파를 채쳐 튀겨 장식. 

오늘 배운 제일 큰 팁은, 조개류를 서빙하기 전에는 칼로 한번 도려내고 쪄낼때 아랫면은 촉촉한데 윗면이 마르니 뒤집어서 낸다는 것. 교수가 얘기해줬을때 속으로 '오오오오'거렸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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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2010년 10월 28일) : 팻투바하님 블로그에서 접한 소식인데 봉에보가 문을 닫는답니다 엉엉...참고하세요.

요리에 좀 더 관심을 가지면서 관련 서적을 접할때마다 골치아픈 한 가지가 생겼다. 서양요리의 역사와 기술 전반에 깊고 넓게 깔려있는 프랑스요리 덕분에 바로 불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것. 마구 읽어내려가다가 불어 한 마디 튀어나오면 딱 막히고. 제대로 된 발음은 전혀 모르는데 미국식 발음으로 읽어주자니 안타까워하다 못해 분노할 프랑스인들이 생각나 입안에서 대충 샹숑섕거리고 넘어가기 일쑤였다. 예전 대학때도 와인 테이스팅 수업을 들으면서 불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공부하고 외우느라 쫌 고생을 했었다. 와인 가게에 가서도 프랑스 와인 뭐 있냐고 물어볼 때 대충 얼버무리면서 샤또...거시기...뭐 있잖아요 하기가 일쑤. 

그래서 결심했다!

불어 공부하기로. 음하하.

여튼 몽환적인 불어발음을 익히는데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주말브런치에 프렌치를 먹어주기로 했다. 이태원에서 작년부터 자자히 들어왔던 봉에보(Bon et Beau)로 예약. 

여기서 불어 한마디!

Bon = Good, 좋다
et = and, 그리고
Beau = Beautiful, 아름답다.
합치면 좋고 아름답다는 뜻.
구뗴라 뀌진 블로그의 클라크님 한마디 : 진선미 중에 진이라는 뜻이랍니다!

발음은 입을 한껏 오무려주고 약간 뽕- 하는 느낌으로 통 튀게
한국어 '에' 처럼, 그러나 약간 입을 덜 벌리고 짧고 에로틱하게
그리고 입술 오무리고 약간 섹시하게 내밀어주면서

Bon et Beau에서 내놓는 음식들은 느끼함과 짭짤함, 감칠맛이 풍만한 프랑스 요리다. 어떤 분들은 처음엔 약간 거부감이 느껴지실지도. 우리가 이 날 주문한 메뉴는 35,000원 브런치 코스메뉴. 예전엔 2만원 브런치 메뉴있었는데 이제 하지 않는다 함.

우선 아주 따끈한 프렌치롤과 또띠아와 함께 아래 스프가 나왔다. 스페인 스타일인 가즈파쵸(Gazpacho)로써, 토마토 베이스며 차게 서빙된다. 위에 아보카도 크림과 양파 등의 살사토핑. 아주 상콤하며 전체적으로 식감이 다양하게 잘 살아있어서 더운 여름날에 에피타이저로 그만!

그 다음 등장한 오징어 리조또. 보통 오징어가 큼직큼직하게 썰어들어가는데 여기는 밥알과 양파와 전체적인 크기가 비슷하게 손질되어 좀 더 조화로운 맛이 났다. 사각함이 살아있는 양파와 쫄깃한 오징어의 식감 역시 굳. 

짭쪼롬한 연어와 감자요리, 그리고 내가 싸랑하는 수란과 홀렌데이즈 소스. 홀렌데이즈 소스는 버터와 달걀 노른자가 주재료인데 마요네즈 만드는 것처럼 휘핑을 매우 열심히 잘해줘야 한다. 내가 만든 것은 뭔가 뻑뻑했는데 요기는 참으로 부드러움(다, 당연한 건가). 신선한 통후추도 플러스. 

이 아름다운 작품은 닭모래집 보리 리조또. 각 재료가 너무 조리가 적당히 잘 되었고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그러나 전체적인 느끼함과 생소한 소스맛이 약간의 호불호가 갈리는 메뉴였었음. 개인적으로 먹으면 먹을수록 약간의 새큼함과 짭짤함, 버섯향이 어우러져 중독되는 맛. 

리조또 말고도 자몽 스파게티와 오리요리를 시켰는데, 자몽 스파게티 완전 강추. 토마토 소스와 쌉싸르달콤한 자몽이 그렇게 잘 어울릴 줄은 정말 몰랐다. 사진이 완전 흔들려 못 올리는 것이 아쉽...

그리고 이 날의 베스트, 디저트. 

토마토 샤베트가 나왔는데, 사실 메뉴에서 봤을 땐 어떤 맛인지 상상이 잘 가질 않았다. 토마토쥬스 얼린 정도밖의 상상력의 한계. -ㅅ- 옆 테이블에 앉아계시던 분이 "으와 완전 맛있어!" 하시길래 좀 기대하긴 했는데, 진짜 일행 모두 한스쿱으로는 너무 아쉬웠을 뿐이다. 정말 통으로 포장해서 파시면 사왔을텐데.

밑에는 알로에스러운 느낌의 바질씨앗이고, 그 위에 부드럽고 새콤하고 상큼하고 은은한 단맛의 토마토 샤베트. 위에는 상큼함을 배가시켜주는 레몬 슬라이스 살짝. 아, 아침으로 먹고 싶다. 츄릅...........


전체적으로 훌륭한 조리에 섬세함과 창의성이 팍팍 느껴지는 정직한 요리. 저녁으로 한 번 먹으러 가야겠다. 햇살은 너무너무 좋았지만 역시 프렌치는 확 땡기지 않을때 가면 브런치로는 좀 무거운 감이...셋이 각각 코스요리 시켰는데 배불러서 다 못먹었다.

위치는 아래 지도 참고. 이태원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었을 때 오르막길이 있고 한남제일교회가 보이는데, 그 왼쪽에 있는 오르막길 샛길로 가야한다. 엥 맞게 가고 있나 싶을때 10미터만 내려가면 바로 식당이 보임. 예약은 02-3785-3330으로.


Bon appétit!
몇달전부터 웬만한 맛집 / 미식가 블로그에 꼭꼭 등장한 정식당이라는 곳이 있었다. 한마디로 한식의 맛을 전혀 새로운 식감과 비쥬얼로 변신해 내놓는 "New Korean"이라는 쿠진을 선보이는 곳이다. 

이곳도 파인 다이닝을 주도하고 있는 Gastronomy(Gastronomy 자체는 좀 더 넓은 의미의 미식, 문화와 음식에 대한 연구를 총칭하는 용어) 문화에 기반한, 즉 분자요리인데, 사실 난 여러 블로그들을 보면서 Gastronomy 이런 레스토랑들이 내놓는 음식들에 엄청난 기대가 가면서도 과연 이것이 정말 맛있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샐러리와 흑미라던지, 가리비와 오미자 등의 조합과 음식보다 미술작품에 가까운 비주얼은 그 맛이 상상이 되지 않았고, 당일에도 2%의 의심을 품고 정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코스는 4만원과 7만원으로 두가지가 있었는데, 4만원짜리 코스를 택했다. 여기에 10% 택스 추가.

첫 타자는 머루젤리와 푸아그라 무스. 그리고 청양고추 바게트와 크렌베리로 추정되는 달달한 얇고 바삭한 빵이 함께 서빙되었다. 달달한 빵과의 조화가 좋았으며, 개인적으로 푸아그라의 사육과정 때문에 먹을 때 100% 마음이 편하지는 않으나, 녹진한 푸아그라와 상큼한 머루의 조합은 좋았음. 그러나 제일 감동은 청양고추 바게트. 예전 Hyatt 호텔 부페에서 먹은 미니바게트 만큼의 감동이었다. 겉은 바사삭하고 안은 뽀송하고 고소하고. 거기다가 청양고추가 아주 잘게 다져서 들어가 있는데, 그 겉돌지 않고 잘 어울리는 조합히 심히 놀라웠으며, 절대 오버스럽지 않은 매운맛, 그렇지만 은은하게 입안에 계속 맴도는 알싸한 매운맛이 매우 즐거웠다. 철저하게 계산된 듯한 이 조합과 매운 정도에 이미 다른 요리들에 대한 기대감이 확 올라갔다.

그 다음 나의 코스였던 해산물 샐러드. 내 앞에 놓여졌을 때의 그 비쥬얼 감동은 생생하다. 저온건조한 메추리알 노른자, 페타치즈, 멜론류(참외였으려나), 그리고 바닥에는 라임젤리. 옆은 자몽거품과 아이올리소스에 버무린 가리비(또 다른 해물류도 있었음). 무슨 맛인지 전혀 상상이 안 감.


나에게는 이 디쉬가 그날 최고의 쇼크였다. 제일 놀라웠던 것은 이파리 한입, 새끼손톱만한 치즈, 소스 한 방울이 너무나 강렬하고 생생한 맛을 뿜어냈다는 것. 특히 저 초록색 소스는 샐러드 야채로 자주 등장하는 arugula를 쓴 것 같은데 무슨 농축엑기스 폭탄이 입안에서 터지는 듯한 정도의 강렬함이었다. 재료 본연의 맛을 극강으로 끌어올린다는 게 이런거구나 싶었음. 먹고 한참 정신놓고 있었다. 

그 다음은 밥/면류 삼총사. 보리된장 리조또와 시금치 볶음밥, 그리고 청양고추 수제비  세가지 중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세명이었으므로 한가지씩! 요것들도 다 맛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마일드한 느낌으로 약간 쉬어가는 느낌.

보리 된장 리조또. 가운데 동글동글한 하얀 녀석들은 무엇일까요?
무려 깍두기. 정말 알싸하게 매운 맛이 난다.

이건 시금치 볶음밥. 역시 깍두기와.

이건 내가 시킨 청양고추 수제비. 베이컨의 고소함과 크런치가 지나가면 크리미한 소스가 느껴지고 그후 치고 올라오는 역시 정제된, 그러나 확실한 매운맛. 거기다가 완~전 쫄깃한 치자반죽 수제비. 

이 쯤 먹고나니 메인이 너무너무 기다려졌다. 도대체 뭐가 나올 것인가.

그리고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브리오슈로 감싼 연어. 그리고 몇가지 야채/과일 다이스와 망고 소스. 이것도 역시 다양한 맛이 너무 조화롭게, 그러나 각각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일단 드셔보시길.

너무나 아름다운 비주얼의 이 디쉬의 이름은 '보물섬'. 가자미와 각종 야채, 그리고 조개국물. 맛의 조화는 좋았으나 식감면에서 생선이 약간 더 부드러웠으면 어떨까 싶었다.

이 날 세명 모두의 찬사를 얻은 메인인 '오감만족 돼지보쌈'. 참 재밌는 이름. 정말 한폭의 그림같다고!
바삭쫄깃부드러운 돼지고기와 달달하고 부드러운 양파? 소스와 고추가 잘 어울려 완벽한 한 입을 만들어냄. 강추메뉴.

이제 디저트가 나올 차례. 메인들은 너무나 맛있었는데 디저트가 약한 것보다 더 큰 실망은 없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한정식집에서 화려한 코스 후 참외와 수박한쪽, 마트서 파는 매실주스 한 잔 내오는 것. 그렇지만 이곳은 디저트를 기대하지 않을수가...

이것은 수정과 맛이 나는 무스/젤리/스펀지케익 조합. 왕신기. 계피향이 강하지도 않고 딱 적당. 아래는 무려 당귀 아이스크림인데 쌉싸르한 맛이 바닐라와 매우 잘 어울렸다.

이것은 팥빙수를 접시위로 옮겨놓은 디저트. 밀크 아이스크림에 올려진 저 쿠키 너무 맛있었으며 녹차무스와 밤도 좋았다. 전체적으로 맛있게 먹은 디저트이나 재료 자체의 맛을 끌어내고 조합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음식의 맛을 만들어낸 것이라 다른 음식보다는 감흥은 약간 덜함. 수정과에 한 표. 봉에보에서 먹은 엄청난 감동의 토마토 샤베트 같은 디저트가 좀 더 내 취향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흐름에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 그리고 디저트 먹기전에 빵조각 등 테이블 깨끗이 한 번 치워주는 서비스, 매우 간단한데 의외로 안해주는 식당이 참 많으나 정식당은 역시 박박 긁어(?) 깨끗하게 치워줘서 흐뭇했음.

마지막으로 차 혹은 커피와 쑥 피낭시에가 나오는데...이 귀여운 것들 정말 대단했다. 폭신하면서도 쫄깃하고 상큼하고 달달하고 부드러운. 정말 한무데기로 사오고 싶었다.

여기까지가 점심코스. 한국에서 최고의 dining experience였으며 가격대비 너무 만족스럽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식감, 온도, 맛의 조화 등 모든 것들이 100% 완벽하게 계획되고 접시 위에 그대로 실현되어 나오는데, 내가 음식 한 접시를 먹고 있다, 이런 느낌은 좀 덜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제된 완벽함과 섬세함이 끌어내는 미각경험의 정점. 왜 분자요리가 이렇토록 각광을 받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식사였다.

여담으로, 블로그들을 읽다보면 정식당 관련해 한식의 진정한 세계화가 뭐니 New Korean이란 이름이 적합하지 않다니 말들이 있는데, 요리는 결국 Anthony Bourdain이 말한 것 처럼 Pleasure Business, 쾌감을 위한 것 아닌가. 어떤 요리법이던, 재료던, 다양하게 조합하고 창조해서 먹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놀라움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훌륭한 요리라고 생각한다. 거기다 한식에서 쓰이는 다양한 맛의 조합에서 영감을 얻고 신선한 비주얼과 식감을 부여해 한식에 익숙한 한국인들도 새롭게 먹어보는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는 데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도산공원 근처에 위치한 이곳의 더 자세한 정보는 윙버스 링크에서 확인해 보시길. (02) 517-4654로 예약은 필수. 일요일 휴무라 들었는데 블로그 보다보면 가신 분도 계신 듯? 여튼 확인 요망.

ps. 얼른 돈 모아서 이제 저녁코스 도전해야지. -ㅅ-
pps. 정식당의 로고는 올리브 가지와 냉이.
<출처 - http://blog.naver.com/powerfilm>
나는 보통 음식점을 가서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다. 관광하러 갔다가 사진 찍는데에 너무 정신이 팔리면 막상 직접 보고 느끼는데의 집중력이 분산되는 것이 싫은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음식이 갓 테이블에 올라 따끈할 때 맛보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블로그에 굳이 여러장 올리지 않아도 이미 리뷰사이트들과 다른 블로그들에 음식사진들은 충분히 올라와 있는데다가, 또한 주문하고 과연 어떤 비쥬얼이 등장할 것인가 상상해 보는 것도 상당한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레스쁘아에서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얘기해 드리고 싶은 스토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보통 셰프에게 최고의 칭찬은 깨끗하게 빈 접시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나 깨끗하게 먹었는지(웨이터에게 약간 민망할 정도로) Before와 After를 비교해 드리고 싶어서 한장씩 박아왔음.

삼성동 아파트 단지 건너편 골목에 자그마하게 위치한 레스쁘아는 윙버스에서 처음 발견했다. 예전 살던 곳이라 반갑기도 했고, 좋은 음식평들에 한 번 가보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 나에게 르 알라스카를 소개해준 그녀와 함께 비오는 스산한 화요일 레스쁘아로 향했다. 


자그마한 공간에 여섯개 정도의 식탁, 가지런히 걸려있는 와인글래스, 요리서적이 놓여있는 은은한 불빛의 레스쁘아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역시 자그마한 오픈키친에서는 남자 세 분이 열심히 준비를 하고 계셨고, 웨이터는 훤칠한 남자분 한 분. 

메뉴를 한참(정말 한참) 고르고 고르다 결국 단품으로 스프, 샐러드, 메인 두가지를 시키기로 결정. 거기에 와인은 보르도 블랑(Bordeaux Blanc) 반병짜리.


첫 주인공 양파스프.


양파스프가 이럴 수 있구나. 어머어머어쩌니이거어떻게이렇게만들지양파를어떻게볶은거야도대체치즈는뭐지오마이갓어머나를 연발하면서 싹싹 긁어먹었다. 나의 짧은 작문실력으로 대강 표현을 해 보자면 뜨끈달콤구수고소짭짤쫄깃부들 정도 되겠다. 여태까지 먹은 양파스프중에 단연 일등. 물론 주관적이라 하겠지만 하도 이 스프에 대한 극찬 리뷰들을 읽어 기대감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저 정도의 감동을 느낀다는 건 대단한 맛이라는 것이 아닐까.

양파스프는 먹고나서 너무 정신줄 놓고 있다가 웨이터가 빈 그릇 치우기 전 사진 못 찍음.


두번째 주인공 비트 샐러드.


잘 익힌 비트는 정말 맛있다. 달짝하면서 상큼하고, 내가 좋아하는 뿌리야채의 그 부드러운 식감까지. 이 샐러드는 절대 드레싱이나 치즈로 범벅이 되어 있지 않다. 한줌의 그린 밑에 사과와 호두, 비트가 섞여있고 블루치즈 두조각이 얌전히 곁들여 나온다. 상큼한 드레싱과 모든 재료들이 산뜻달콤새콤아삭한 조화를 자랑하며 약간 꼬리꼬리한 블루치즈가 깊이를 더해준다. 그리고 샐러드 먹다보면 잎파리들이 너무 많이 남거나 부족한데, 요것은 딱 좋았음.


초토화.


옆 테이블에 여섯명의 테이블이 있어 메인이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킨 메뉴들의 비주얼과 맛에 점점 기대가 되며 들썩들썩하고 있을 때...


오리 콩피 등장.


우선 육수와 아래 깔려있는 보리밥(?)을 조금 떠서 먹었는데 약간 맹숭한 느낌. 몰려오려는 실망감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거부하고 있었는데 웨이터님, "콩피는 살을 발라 육수와 함께 숟가락으로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아하하하 그래 나 콩피 먹어본 적 없고. 베시시 웃으며 감사의 미소를 날리고 얼른 살을 발랐다. 

오리를 뒈췌 어떻게 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럽고 쫄깃한 살점과 깊은 맛의 육수, 탱글탱글한 보리밥이 어우러진 한 숟갈. 정말 구수하면서 기름지면서 담백했다.(나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 조합인지 모름) 거기다가 너무 느끼하지 않게 잡아주는 은~은한 상큼한 뭔가가 끝맛에 느껴졌다. 먹으면서 뭘까뭐지도대체뭐냐고아진짜뭐지를 되뇌이며 먹다가 순간 오렌지라는 것을 깨달으니 눈에 들어오는 곱디고운 오렌지 제스트.(근데 알고 봤더니 메뉴에 오렌지라고 써 있어서 엄청 허무했음)

이 메뉴가 특히 좋았던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식어서 맛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더 깊어진다는 것.

역시 초토화.



그리고 마지막 주인공인 랍스터 리조또.


얼마나 훌륭한 비주얼인가. 

리조또의 노란색 주인공은 사프란(Saffron)인데, 꽃에서 나는 향신료다. 꽃 한송이당 두세가닥밖에 없는 수술을 체취한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비싸다. 그렇지만 향기로우면서 감칠맛나는 특이한 향신료다.

리조또는 밥알이 퍼펙트한 알덴테(내 맘대로 갖다 붙이기)였다. 시작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끝에 살짝 씹히는 맛. 랍스터는 겉에는 탱글, 속은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정말 남산타워의 엔그릴에서 먹었던 퍽퍽하고 드라이한 8만원짜리 랍스터랑 너무 비교되는...


역시 깨끗하게 마무리.


접시와 랍스터 껍질에 묻은 소스까지 아까움.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정말 반 정신이 풀려있었다. 그렇지만 잠깐 정신을 차리고 디저트 주문.


크렘블레(Crème brûlée) 등장.


크렘블레는 바닐라빈을 충분히 써서 풍부한 바닐라맛과 부드러운 커스터드에, 적당한 두께의 카라멜. 너무 클래식한 맛이어서 그런지 쇼킹한 감동은 없었으나 은근하고 부드러운 마침표. 


이마저 싹싹.



참고로 식전빵은 그냥 무난했다. 톰볼라의 포카치아가 더 감동. 아마 빵을 직접 굽는 게 아니라 공수해오는 듯.(제가 빵은 열심히 만들어 납품해드릴 용의가 있는데 굽신...) 그렇지만 같이 나오는 트러플 오일과 올리브 스프레드는 아주 깔끔하고 좋았다.

청담역 바로 근처인 강남구 삼성동 65번지에 위치한 이 곳은 뉴욕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다니엘에서 경험을 쌓은 임기학 셰프가 오픈한 곳이라 한다. 자리가 협소하니 예약권장.(02-517-6034) 일요일 휴무. 가격대는 스프/에피타이저가 8천원 - 2만2천원. 메인은 2만5천원선에서 5만원선까지. 디저트류는 8천원대. 코스는 5만8천원 - 9만8천원선. 별도세금 10%. 아, 와인이 반병짜리가 많아 좋다.

예전 맛집 리뷰에 관한 단상에 올렸듯이, 정말 맛있는 집은 서비스나 칼로리 등에 신경쓸 겨를이 없이 음식에 집중하게 된다. 레스쁘아는 그런 즐거움과 감동을 안겨준 손에 꼽히는 집이었고, 조만간 다른 메뉴들을 먹으러 갈 계획이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캐주얼한 복장에 슬슬 산책겸 걸어가 훌륭한 요리를 맛볼수 있는 소중한 곳. 주방의 바빠지는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고 밥먹고 셰프의 얼굴을 보며 잘 먹었다고 인사할 수 있는 곳.

아, 나 셰프님 안아드리고 싶었는데 수줍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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