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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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2.04.04 "진짜" 생크림 케이크
  2. 2021.02.13 집에서 호떡 만들기는 계속된다
  3. 2013.09.17 제빵을 통한 초심찾기
  4. 2013.09.13 맛이 있는 음식
  5. 2013.09.12 새 조리화
  6. 2013.09.10 요리에 미쳤단 것은 4
  7. 2012.10.26 Ode to Chef Park 2
  8. 2012.09.27 참 어려운 맛 묘사하기 3

인간은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음식을 섭취하는 제일 기본적인 이유에는 당장 숨을 쉬고 움직이는데 필요한 열량과, 아프지 않고 건강한 일상을 누리는데 필요한 영양소가 있다. 아직도 이 기본적인 열량과 영양소를 충분히 얻지 못해 괴로운 삶을 이어가는 인류가 상당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열량과 영양소는 이미 당연한 것이며, 오히려 과한 열량에 대해 관리를 해야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21세기 서울, 음식은 차고 넘쳐난다. 편의점, 카페, 식당, 술집, 레스토랑, 마트에는 정말로 다양하고 새로운 먹거리들이 가득하다. 만두가 먹고 싶은 날이라면, 편의점에 들러 냉동만두를 전자레인지에 4분 50초 돌리거나, 길 건너 분식집에서 고기만두 김치만두 반반을 주문하고 10분을 기다리거나, 마트에 들러 드넓은 냉동만두 코너에서 30여분을 고민하거나, 혹은 귀갓길에 앱을 켜서 30년 역사를 지닌 손만두 집의 특별한 만두를 주문할 수도 있다.

얼마 전부터 달콤한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이 먹고 싶었다. 케이크를 살 수 있는 선택지는 만두만큼이나 다양해서, 일단 동네 근처 케이크를 파는 곳에 들어가 앉았다. 친구를 끌고 가서 욕심나는 대로 제일 맛있어 보이는 두 조각을 주문했지만, 첫 입에 실망하고 말았다. 퍼석한 스펀지와 미끌거리는 크림, 단순한 백설탕의 단맛만 남아 있는 케이크에 서너입을 먹고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딸기는 시럽에 코팅되어 마른 듯 한 반쪽짜리가 전부였다.

며칠이 지나고 가족들과 외식을 할 기회가 생겼다. 아직 케이크에 대한 허기가 채워지지 않은 나는, 외식 장소 근처를 물색했다. 일부러 케이크를 맛있게 먹기 위해 배는 적당히 채우고, 이번에도 인원 수를 핑계로 두 조각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아무리 다시 먹어봐도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아 살찔텐데, 하면서도 자꾸 손이 가는 케이크가 아니었다.

분명 맛은 있는 케이크였다. 딸기는 여기서도 반 개짜리 였지만, 겹겹이 쌓인 크림과 스펀지는 충분히 달콤하고 폭신했다. 하지만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누아즈의 섬세한 폭신함을 돋보여 주고, 생크림만의 진한 고소함과 향긋함을 완벽한 휘핑으로 살려주려는 마음. 신선하고 잘 익은 딸기의 과즙이 톡 터지며 크림과 함께 입안에서 선사하는 그 환상적인 하모니를 선사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우리가 흔히 '정성'이라고 표현하는 이 마음은 열량과 영양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통해 먹는 사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품질 좋은 식재료를 소중히 다루는 마음이건, 먹는 사람의 행복한 표정을 상상하며 요리하는 마음이건, 이 마음들은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외로움을 보듬어 준다. 연인의 열정적인 사랑이 아닌,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사랑을 가슴 깊이 채워준다. 진심이 가득한 "진짜"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풍성해지는 이유다.

혀를 즐겁게 하는 맛은 쾌락을 선사하지만, 맛 자체만으로는 마음까지 채워줄 수 없다. 레스토랑에서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도 뭔가 허한 날이 있는데, 단촐하게 차려 준 엄마의 집밥을 먹었을 때 오히려 만족스러운 날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숙련된 조리기술로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지만, 재료와 먹는 사람을 아끼는 마음까지 더해진다면 그야말로 정말 여운이 남고 감동을 주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며칠 전, 먹고 싶었던 "진짜" 케이크를 찾았다. 예상치 못하게 낯선 동네 은평구 한복판에서 나는 생일케이크를 구해야 했고, 케이크 아뜰리에라는 곳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쇼케이스에 진열된 디저트에서는 베이킹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뿍 묻어났다. 정확하고도 자연스럽게 발린 고운 결의 생크림, 영롱하게 빛나는 블루베리 한 알 한 알, 부드러운 갈색의 바삭한 타르트지. 화려한 장식과 유행을 타는 재료들로 눈길을 끄는 과시용 디저트가 아닌, 존중과 배려를 담아 좋은 재료와 숙련된 기술로 켜켜이 쌓아 올린 그런 케이크들이 놓여 있었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케이크를 크게 한 조각 잘랐다. 진한 우유의 고소함은 풍성하고 부드러운 생크림을 타고 들어와 혀를 가득 감쌌고, 바닐라와 계란, 설탕이 만나서 내는 맛의 조화는 단맛에 눌리지 않고 은은히 지속되었다. 사이사이 촘촘히 박혀 있는 딸기가 씹힐 때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어릴 적, 예쁘고 잘 익은 딸기만 골라 엄마가 정성껏 만들어 주었던 추억의 내 생일 케이크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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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홈메이드 호떡 포스팅을 올린 후, 결국 호떡 누르개를 구입했습니다. 요리사로의 전업, 몇번의 이직, 결혼과 육아를 거쳐오는 시간 동안 호떡 누르개는 주방 한구석 잡동사니칸에서 무사히 살아남았고,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반죽을 해 보았어요.

다시 호떡을 만들면서 레시피 업그레이드 및 재미있는 사진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요리를 쭉 하면서 음식의 맛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에 담겨있는 정서와 이야기도 못지 않게 소중하고 즐겁다는 것을 깨닫고 표현하려 노력중입니다. 즐겁게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촬영 및 디자인
https://instagram.com/saejun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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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일하는 곳 페스츄리 쪽 일손이 모자라 급히 임시 투입되었다. 마지막으로 빵을 잡아본 건 존슨앤 웨일즈 재학중이었던 일년반 전. -_-;

 

청양고추가 들어간 바게트

 

다시 오랜만에 빵 반죽을 잡았을 때 처음 느낀 건 내 마음의 페이스가 상당히 급해져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초 단위로 시간싸움을 하는 라인에 본격적으로 선지 어연 일년이 넘어서일까. 그리고 예전만큼 반죽이 손에 착착 달라붙지 않는 느낌. 아아주 오랜만에 자전거에 올라타 마음만 급하고 불안불안 위태위태 바퀴를 굴려가는 기분이라니.

 

그렇지만 혼자 빵을 치기 시작한 이틀째, 빵 반죽하는데 들어가는 덧가루의 양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다시 반죽이 부드럽게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큼지막한 바게트를 여덟개 성형하는데, 마지막 바게트를 접어주는 도중, 갑자기 스르륵 3년 전으로 돌아갔다. 발효가 잘 된 부드럽고 뽀송뽀송한 빵 반죽을 만지며 그 매력에 처음 취했던 그때로.

 

블랙올리브 치아바타

 

빵이 참 만족스럽게 나온 그 날, 퇴근 후 집에 와 바로 컴퓨터를 켰다. 지난 일년이 넘도록 미처 채 정리를 못한 채 폴더에 가득 쌓여있던 제빵 관련 사진들을 들추어 보았다. 참 많기도 많아라. 그렇지만 한 장 한 장 볼 때마다 놀랍게도 그 빵을 구웠던 그날의 느낌, 그날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내가 얼마나 매 순간을 즐기고 설레어 했었는지 말이다.

 

내가 하는 음식은 하루하루의 내 마음과 컨디션을 냉정하리만치 매번 정확하게 담아내어 고단하게 느껴질때도 있지만, 그로 인해 나를 돌아보게 되고 그 과정이 다시 음식에 담겨질 때 참 행복하다.

 

고맙다 빵아.

 

바게트들 2차 발효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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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이 있는 음식

요리단상 l 2013. 9. 13. 14:51

맛이 있는 음식. 맛이 좋은 음식 말고, 無맛 말고, 맛이 있는 음식. 그런 음식이 만들어지려면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 수지 타산 유행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재료와 조리자체에 집중해야 되는데, 요새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점포들 중엔 그런 노력을 하는 곳이 보이질 않는다. 전 메뉴 19,800원에 계란 후라이 얹어주어 유행 탈 생각 말고, 그냥 들어가는 버섯이나 베이컨의 맛을 잘 살려, 정말 버섯이랑 베이컨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식을 내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태원동 인스턴트 펑크고등어 파스타. 달달한 고등어 살, 케이퍼, 올리브, 은근한 고추씨의 향이 녹아든 뜨거운 올리브 오일로 착~ 코팅된 스파게티 면이 후루룩 입술을 따라 빨려들어오는 그 느낌이란 *^^* 

 

無맛의 케이스는 너무 많다. 화려하게 휘핑크림과 카라멜 소스에 파우더를 뿌려도 눈을 감고 한 입 마셔보면 사실 커피의 향은 굉장히 미약한 @#^*(*^@%* 라떼들이나, 온갖 재료가 들어갔다 하지만 음미해보면 결국 느껴지는 맛은 짭짤한 우유/생크림에 불과한 "까르보나라"나.

 

내가 요리를 아직까지 사랑하는 제일 큰 이유는 바로 내 자신이 접시 위에 올라간 음식에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윤을 생각하고 만들면 그게 보이고, 맛을 생각하고 만들면 그게 보이고.

 

박찬일 셰프님 찬스브로스 사장님 항상 강렬한 "맛"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녹사평역/경리단길 부근의 찬스브로스에서 맛볼수 있는 에스프레소 마끼아또. 그을린 카라멜 맛(내 친구말로 뽑기 맛 ㅋㅋ), 그 후에 딸려오는 부드러운 산미와 화사한 향. 이런게 맛 있는 커피일지어라. 

 

 

역시 인스턴트 펑크에서 함께한 버금송이 파스타. 버섯과 크림, 생면의 부드러우면서 생동감 있는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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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조리화

요리단상 l 2013. 9. 12. 03:42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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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비스 개시 이후 맞이하는 첫 손님 세분, 메인 메뉴 세가지를 각각 선택했다. 소스를 일인분씩 냄비에 담아놓고 가니 노랑, 주황, 적갈색의 가을빛 트리오가 어찌나 이쁜지. 바쁜 와중에도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주방에서 일하다 보면 순간순간 인내심을 잃거나 지칠 때가 많은데, 이런 순간순간이 있기에 아직도 즐겁게, 어쩌면 매일매일 더욱 더 즐겁게 요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정신없는 와중, "별 거 아닌" 이런 사소한 것에 감탄하고 사진을 찍을 만큼 아름답게 느끼는 것, 그게 바로 요리에 음식에 미쳐있는 게 아닐까.

 

 

근데, 진짜 이쁘지 않나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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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de to Chef Park

요리단상 l 2012. 10. 26. 10:32



얼마전 박찬일 셰프님이 또 한권의 책을 내셨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에세이 집. 정말 내가 쓰고 싶었던 느낌의 글인데 역량과 경험 부족으로 흉내도 못내고 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늦봄에 뵈었을 때 구워주신 오징어가 생각이 나 아래글을 써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국립학교였던(소위 말하는 어디어디 부속초등학교) 우리 학교는 다른 공립학교에 비해 일찍 급식을 시작했다. 메뉴도 다양해 매일 다른 반찬과 국이 나오고, 가끔씩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핫도그에 크림스프, 혹은 닭죽같은 별식도 제공되었다.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과 플라스틱 의자로 빼곡한 서늘한 급식실에서 아이들은 어깨를 맞대고 일렬로 앉아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서투른 젓가락질로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은 학생들이 쭈욱 줄을 서 식판 검사를 받는 광경은 급식실의 서늘함을 걷어내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끔 지독한 담임선생이 걸린 반은 식판을 머리 위로 엎어야 건물을 탈출할 수 있었다. 소주잔이야 머리에 털어도 알콜 몇 방울 맞고 말지만, 김칫국물은 어쩌라고. 여튼 싫은 반찬이 나오는 날은 여간해서 다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생님 눈치를 보며 몰래 식탁 밑으로 시래기나물을 버려버리곤 했다. 치우는 아주머니들은 한숨이 나왔겠지만.

나에게 제일 고역이었던 난관은 시래기나물도 아니고, 오이짠지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리는 음식 하나 없었던 나도 도저히 항복을 외칠 수 밖에 없던 메뉴는 바로 맵고짠반찬3종세트에 얼큰한 국까지 곁들여 나오는 콤보였다. 차라리 반찬 하나라도 새콤한 것이 있었더라면 조금 먹기 쉬웠을까, 고추장에 진득하게 버무려진 오징어채, 뻘건 배추김치, 고추기름이 흥건한 오뎅볶음을 먹다보면 내 혀가 매운 범벅이 되 버리는 느낌이었다. 미美를 공부하셨을 우리 미술 담당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식판의 시뻘건 미학을 공감해 드리지 못해 화가 나셨던 걸까. 유독 그런 날 식판 검사가 심하게 느껴진 건 그래서였을까.

마치 차력대회 같았던 그 경험들은,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도 식당 곳곳에서 치룰 수 있다. 고추장에 뒤덮여 재료맛은 하나도 모르겠는 낙지볶음을 물을 벌컥벌컥 마셔가며 가까스로 다 먹고 나면, 철판에 흥건하게 고인 검붉은 양념에 밥을 볶아 한방울도 남김없이 먹게 배려해준다. 매운갈비찜, 불닭, 해물찜, 거기에 어김없이 딸려나오는 매운반찬3종세트와 밥볶아먹기 옵션. 그래도 내 돈 내고 먹는다고 식판 검사는 안하니, 감사해야 할 일인가. 오히려 한국사람이면 매운 걸 잘 먹어야 한다는 요상한 세뇌교육에 이 정도면 견딜만하네, 라며 자긍심을 느꼈었기도? 음식맛은 잘 기억나지 않고 연신 물을 들이키고 땀을 닦아내는 행위의 기억만 아련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홍대의 라꼼마. 포근한 봄 햇살이 가득했던 5월말, 박찬일 셰프님이 구워주신 오징어 맛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혀끝에 생생하다. 소금 외에는 별다른 양념이 없이 정직하게 누워있던 오징어 한마리. 씹으면 씹을수록 부드럽고 달콤한, 그리고 살짝 씁쓸한 오징어의 바다향기가 콧속까지 가득 차 올랐다. 그런데 무슨 오징어였더라. 하긴 오징어건 낙지건 맨날 맵게 무쳐버리니 내가 어찌 알겠냐며 막연한 원망을 할 뿐이다.

후루룩 써버린 울퉁불퉁한 글이지만 항상 영감과 희망을 주시는 박셰프님께 드린다. 

책은 물론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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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서두는... 보고 나서 눈물나도록 한참 웃었던 개콘 '네가지'의 관련 내용 동영상(1:25부터)



속살을 하얗게 드러낸 양파가 정열적인 고춧가루를 유혹하고 있어. 그 둘이 만나서 아주 뜨거운 제육볶음의 탱고를 추고 있지!!!!!! ㅋㅋㅋㅋㅋㅋㅋ


이런저런 요리와 음식관련 글을 읽고 있으면 빈번하게(혹은 거의 유일하게) 등장하는 표현들이 있다. 담백하고, 느끼하고, 고소하고, 풍미좋고, 감칠맛 나고. 그런데 사실 정확한 뜻을 찾아보면 이 표현들이 묘사할 수 있는 "맛" 내지 "감각"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국어사전 참조]


담백하다

2. 아무 맛이 없이 싱겁다. ≒담담하다1[1]ㆍ담박하다. 
3. 음식이 느끼하지 않고 산뜻하다. ≒담담하다1[1]ㆍ담박하다ㆍ담하다. 


느끼하다 
1. 비위에 맞지 아니할 만큼 음식에 기름기가 많다. 
2. 기름기 많은 음식을 많이 먹어서 비위에 거슬리는 느낌이 있다. 

고소하다
━ [ⅰ] 볶은 깨, 참기름 따위에서 나는 맛이나 냄새와 같다. 

풍미
[ 風味 ] 1. 음식의 고상한 맛. ≒맛매. 
[ 味 ] [명사]푸지고 좋은 맛.

감칠맛
1. 음식물이 입에 당기는 맛. 

그리고 이건 나도 잘못 알고 있었던 건데, 녹진하다라는 표현은 깊고 진한 맛이 아니라 
1. 물기가 약간 있어 녹녹하면서 끈끈하다. 
2. 성질이 보드라우면서 끈기가 있다.
(뭐 사전에 의하면)

때문에 예를 들어 "피자가 담백하니 맛있어요~"라는 표현은 기름기가 과하지 않아 비위에 거슬리지 않았다, 맛이 좋았다지, 도우의 그을린 향, 도우의 텍스쳐(질겼다, 부드러웠다, 겉은 파삭하니 가벼웠는데 내면은 살짝 쫄깃하니 폭신했다), 피자 소스의 신맛 단맛 짠맛, 치즈의 특유의 향, 늘어나는 정도, 온도, 이런 자세한 맛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나저나 피자가 담백하면 맛있나? -_-)
 
인간이 무언가를 먹었을 때 느끼는 "맛"은 온도, 텍스쳐, 맛, 향 등 매우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주는 경험인데다가, 비교는 잘하지만 이게 어떤 향이다, 맛이다라고 콕 집어낼 수 있는 능력이 낮아 묘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리스트를 작성해보기 시작했다. (완전 무작위)

떫다, 깔끔하다, 매끄럽다, 쫄깃하다, 꼬들꼬들하다, 아삭하다, 끈적이다, 거칠다, 바삭하다, 버석하다, 말랑말랑하다, 몰랑몰랑하다, 질기다, 연하다, 부드럽다, 보드랍다, 녹진하다, 사르르 녹다, 촉촉하다, 탱글탱글, 차지다, 퍽퍽하다, 사각사각하다/사각거리다, 서걱서걱하다/서걱거리다, 파삭하다, 퍼석하다, 쫀득하다, 기름지다/느끼하다, 얼얼하다, 물컹하다, 몰캉하다, 텁텁하다, 아리다, 담백, 감칠맛, 고소.구수, 풍미가 있다, 톡 쏘다, 얼큰하다, 시원하다, 비리다, 느끼하다, 쩡하다, 칼칼하다, 짭짤하다, 달다/달달하다/달콤하다/달곰하다, 고소하다, 구수하다, 시큼하다, 새콤하다, 시다, 시금털털, 밍밍하다/싱겁다, 맵다/매콤하다, 슴슴하다, 쓰다, 씁쓸하다, 밋밋하다, 싱그럽다, 상쾌하다, 화사하다. 
(+ on and on)

여기서는 촉감을 나타내는 것도 있고, 맛 자체도 있고, 향, 혹은 복합적인 단어도 있는데, 이렇게 늘어놓아 보아도 막상 무언가를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건 매한가지. 

예를 들어 송이버섯의 맛을 설명해 보려고 하면...

- 텍스쳐: 조리법에 따라 좀 다르겠지만 뭔가 보송하면서도 아주 살짝 쫄깃하면서도 몰캉하지는 않고 매끄러운 건 아닌데 그렇다고 크리미하게 부드러운 것도 아니고. 
- 맛과 향: 뭔가 묵은 듯한 버섯 특유의 맛(이건 어찌 묘사 ;ㅁ;)에 수풀 냄새도 좀 나고 어릴 적 나무에서 껍질 벗겨 맡으면 나던 싱그러운, 그렇지만 단단한 나무의 향.그리고 표현 못하겠는 다른 오묘한 향들.

영어도 earthy나 musty, floral, nutty, 이런 표현들이 발달되고 널리 사용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so delicious! 에 그치지만, 좀 더 음식의 맛을 체계적이과 정확하게 표현해보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가면 국어사전 한권 펼쳐놓고 연구 좀 제대로 해 봐야겠다. 롱텀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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