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제부턴가 "버터와 설탕을 크림화한다"로 시작하는 레시피는 한동안 나의 기피대상이었다. 버터와 설탕을 휘핑해 마요네즈다운 상태로 가볍게 만들어주는 이 작업, 아무리 저어도 마요네즈화는 커녕 설탕입자는 그대로 서걱서걱거리고, 달걀을 넣으면 분리가 되어버리고 하는 통에 나에게는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한동안 인터넷과 책을 뒤져보면서 이것저것 시도. 일반 설탕대신 파우더슈거도 사용해 보고, 설탕입자가 다 녹아야 한다길래 버터를 슬쩍 중탕해가면서 휘핑해보는 작업도 시도해보고(나중에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깨닫게 됨) 핸드믹서로 십분, 십오분 넘게 열심히 돌려보기도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반죽에 그대로 사용하니 케이크류는 볼륨이 안 나오고, 쿠키류는 푹 퍼져버리고.






버터의 제대로 된 크림화가 기본인 
예쁜 모양쿠키들. 







이런 이유로 정말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도 '크림화'라는 단어가 보이면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뉴욕타임즈의 food 섹션을 읽고 있는데 "Butter Holds the Secret to Cookies That Sing(의역 : 날아갈듯한 쿠키의 비밀은 바로 버터에 있다)"라는 기사가 눈에 턱 들어오는 것이다. 기사 첫머리에 나오는 머릿속에 상상한 예쁘고 각 잘 잡힌 쿠키와는 달리 볼품없이 퍼져버리는 쿠키에 스트레스 받는 홈베이커들의 절규...헉 딱 내 얘기가 아닌것인가! 눈이 번쩍 뜨여 얼른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포슬포슬한 파운드의 기본인 크림화 작업의 최적온도는 섭씨 18.5도.

이 기사의 핵심은 바로 버터의 온도. 버터란 결국 유지방과 물이 결합되어 있는 구조인데, 녹으면 이 구조가 무너져 내리며 다시 냉장고에 넣어도 이 구조를 되살릴 순 없다. 그런데 이 크림화는 버터의 구조가 지탱이 되어야만 제대로 이루어진다. 버터를 마요네즈 질감처럼 풍성히 부풀려주는 것은 공기를 골고루 섞어주는 작업인데, 버터가 녹아버리면 공기가 들어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버터가 너무 단단하면 잘 풀어지지가 않고 또 여전히 공기가 들어가기 어렵다. 

럼 크림화의 최적화 온도는? 정확히 섭씨 18-19도 사이. 버터가 녹는 온도는 20도, 무려 1-2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휘핑하는 보울의 온도라던지 주변의 온도가 높다던지 하면 미리 신경쓰는 것이 좋다. 온도가 좀 올라간다 싶으면 잠시 냉동고에서 식혀 20도를 넘지 않도록 한다. 처음에는 온도계 없이 감이 오기가 힘들기 때문에 꽃아가며 온도를 확실히 체크한다. 온도만 잘 지키면 놀랍게도 평소보다 아주 쉽게 크림화가 되는 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온도를 신경써야 하는 것은 바로 달걀. 대부분의 레시피에서는 버터와 설탕을 크림화 한 후에 달걀을 섞어주는데, 달걀의 온도가 너무 차다면 버터가 굳어져 분리현상이 일어난다. 때문에 반드시 실온에 두었다 사용할 것!

마지막으로 손으로 만져보았을 때 설탕입자가 만져지는 것은 괜찮은 것이다. 버터자체에 공기가 들어가 상대적으로 덜 서걱거리게 느껴지는 것이지 버터자체에 설탕이 완전히 녹지는 않는다.


제과의 아주 기초이자 필수인 크림화의 온도를 잘 지켜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멋드러진 모양쿠키에 도전해보자!


이것저것 만들어 주변에 돌리기 일년여, 이번엔 처음부터 작정하고 주문을 받아보았다. 주로 어른들을 위한 것이고 추석이라 이전 간단한 포스팅에 올린 것처럼 사과, 밤, 호박 등의 가을스러운 재료를 테마로 잡았다. 거기에 초콜렛과 바나나 등으로 좀 더 달콤함을 추가. 저번 이벤트처럼 요고조고 들어간 박스로 할 것인가, 조각케익식으로 할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여덟가지가 한조각씩 골고루 들어간 8종 케이크 세트로 결정.


막상 야심차게 여덟가지로 구상을 했지만, 맘 한켠에는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이 약간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주문과 입금까지 받고 실제로 착수해야한다고 생각하니 그 의구심은 두려움으로 변하고, 새로이 도전하는 레시피도 있는데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거기다가 추석 하루이틀 전에만 배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다들 일찍 휴가들을 내셔서 평일 저녁에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점점 부담감은 커져갔지만, 뭐, 내가 일 벌여놓은 것. 숨 한번크게 쉬고 재료 장보기부터 시작!


케이크류가 여덟가지니 평소보다 재료는 어마어마했다. 달걀 서른개, 버터 큰 걸로 두덩이, 설탕 한푸대, 밀가루 한푸대. 거기 단호박 두덩이. 혼자 베이킹을 할때보다 선물용은 재료 고르는 것도 그만큼 더 신경이 쓰였다. 사과도 더 이쁜 것을 고르게 되고, 원산지도 그만큼 더 신경쓰게 되고. 


포장재료는 온라인으로 사려고 했으나, 추석연휴가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비상걸린 택배사들이 이틀안에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에 아침일찍 방산시장도 다녀왔다. 리스트를 만들어가 한 삼십분이면 쇼핑이 끝날줄 알았으나 웬걸, 막상 오프라인으로 가니 없는 것들도 많고 웬지 장사할 마음이 없어보이는 주인분들이 너무 많아 기분도 좀 상했다. 생각해 놓은 포장컨셉이 있는데 온라인서 찜해놓은 둥그런 박스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 예상외로 방산시장 바닥도 좀 헤메고 다니고......우여곡절 끝에 장보기를 끝내니 땀은 한바가지에 몸은 녹초.


집에와서 첫날은 우선 재료 계량부터 시작했다. 마른재료를 각각 따로 개량해 지퍼백에 스티커로 구분해 담아놓고 버터 등등도 나누고. 당근 갈은 것, 레몬껍질 및 사과 등 전처리가 필요한 재료들도 미리 준비해 놓고. 치즈케이크를 위한 녹차 제누와즈 굽고. 이렇게만 하는데도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회사 다녀와서 하려니 잠도 모자라서 졸린 눈으로 계량하는 바람에 막 흘려서 부엌도 난장판.


다음날은 머랭등을 내지 않아도 되는 조금 더 수월한 것들로 구웠다. 집안은 오븐온도로 점점 더워가고...설겆이 거리는 늘어가고...그래도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찬 부엌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결국 찹쌀케이크까지 다섯판을 굽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팔 겉어부치고 세판을 마저 굽기전, 이미 완성된 아이들을 슬라이스 하는데, 끄악, 바나나 브레드 중앙이 전혀 익지를 않은 것이다. 더 예쁘게 한다고 바나나를 꽃아서 구웠는데, 중간에까지 꼽으니 습기때문에 익지 않은 것. 분명히 꼬치테스트 했을 때는 묻어나오질 않았는데 말이다 엉엉......

문제의 덜 익은 바나나 브레드. 얼핏 보면 커스타드 크림 같다.
이런 상태로 다시 오븐에 넣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븐에서 한 십여분 더 구워봤다. 그러니 익긴 있었는데, 역시 속살은 꾸덕꾸덕해지고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겉표면은 초콜렛처럼 확 진해져 버렸다. 바나나 일곱개에, 온갖 향신료와 유정란 등 재료등이 너무 아까웠고 짜증이 몰려왔다. 

이걸 새로 다시 구워야 하나? 조금 식혀서 먹어보니 먹을만은 했고, 여덟가지나 되니 한조각 별로라도 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듯 했다. 통에 넣어두고 몇시간이 지난 후 먹어보니 좀 더 촉촉해졌을 때는 정말 갈등이 되었으나, 역시 내가 봤을 때 실패작인 이걸 아무렇지 않게 내보낼 수는 없었다. 임기학 셰프님이 셰프는 모든 과정에 떳떳하고 정직해야 한다, 라고 하신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며 결국 한판 새로 구웠다.


바나나 브레드 사건 말고는 그 어떤때보다 생각한만큼의 퀄리티가 나와주어서 매우 행복했다. 좀 더 긴장하고, 정성을 다하니 그만큼 손끝에서 실현이 되더라. 거기에다가 저번 이벤트 할 때 했던 여섯가지 이상의 더 많은 가짓수를 하면서 그만큼 더 멀티태스킹 능력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고. 잘 포장해서 배달했을 때 즐거워 하는 내 첫 고객(?)들을 보며 느낀 그 뿌듯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수 없었다.

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정말 많은 맛집, 요리 블로그들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하루 세끼를 아무리 잘 먹어도 으와 맛있겠네 침 삼키게 된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 웹서핑 잠깐 하다 잘못 걸리면 심각한 어택. 얼마전에도 이메일 잠깐 확인하다 친구가 알려준 링크를 가보니 젠장, 먹으러 여행 다니시는 분의 블로그. 숯불향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길거리 꼬치구이부터 필리핀에서 먹은 온갖 열대과일 사진까지. 한참 모니터에 얼굴박고 있엇다. 나도 요새 종종 지인들에게 듣는 투정, "니 블로그 가면 너무 배고파져. 밤에 절대 안가"

요새 그래서 방문자 수가 떨어졌나? 많이 좀 놀러와 주시고 추천도 꾹꾹 에헴에헴

그러나 사실 좀 더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족이다. 요새 영화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4D 영화처럼 냄새도 마구 풍기고, 비주얼도 단순히 사진이 아닌 3D. 예전에는 실력이 부족해 집에서의 시식용으로만 이것저것 만들어 봐서 가족들이 먹을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주로 선물과 판매용만 만들어 아버지 말마따나 "부스러기 떨어지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역시 제일 고통스러운 건 바로 우리집 최고령(?) 주니군. 가족들이야 아무래도 요고조고 시식하게 되지만 평생 사료만 먹고 사람음식은 철저히 배제당해야 하는 주니에게 일부러 제공되는 부스러기는 없다. 그렇지만 큰 눈망울과 애처로운 낑낑댐을 무기로 점점 사람음식에 대한 영역을 넓혀가던 주니군, 이제는 내가 요리를 하고 있으면 뭐 떨어지는 거 없나, 하고 내 발 밑에서 서성거린다.

이번 추석선물용 케이크들을 만드느라 이틀동안 밤새 오븐을 돌려대었더니, 집안에 진동하는 향기들이 내가 맡기에도 대단했다. 바닐라, 바나나, 초콜렛 등 온갖 냄새를 퐁퐁 풍기니 부엌을 떠날 줄 모르는 주니. 나도 "어이 저리가"로 일관하며 팽팽한 신경전.

아버지가 시식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는 주니군. 애처롭다.


케이크들을 포장할 때 전부 슬라이스해서 넓은 테이블에 놓고 작업을 했는데, 그 앞에 앉아서 떠날 줄을 모르는 거다. 정말 뚫어져라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 그러나 몸매는 슈렉 포에버 꿈속의 고양이 몸매가 되어가고 있고...
 

이렇게 호시탐탐 이틀동안 기회만을 노리던 주니군, 결국 어제 내가 케이크들 늘어놓고 잠시 한눈판 사이에 한건 하셨다. 거실로 돌아오니 식탁위에 두 앞발을 걸치고 서 있는 녀석. "주니야!" 버럭했더니 얼른 꼬리를 내리고 자리를 비킨다. 식탁 위를 보니 윽, 케이크 반조각을 뚝딱. 그것도 어떻게 알고 단가 제일 비싼 단호박 치즈케이크로. 앞으로 점점 더 신경전은 거세지고 이 녀석의 목표는 높아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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