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처음 인턴일지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배운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그날그날 기록해두는 이유가 제일 컸다. 그렇지만 점점 배우는 것이 많아지고 반복학습에 의해 자잘한 것까지 매번 기록해두지 않아도 되자, 그 날 제일 기억에 남았던 일 몇가지를 추스려보고 돌이켜보는 시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요 며칠새 가장 인상깊고 기분좋은 기억으로 미소지으며 잠들게 만드는 일들은 대부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교감을 경험한 사건(?)들. 


예전 강남역 카페에서 일할때부터 내가 제일 사랑한 주방일의 한 부분이지만, 서로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지는 희열이라던지, 내가 미치도록 바쁘거나 결정적인 도움이 절실한 순간 딱 나타나 도와준다던가, 혹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응원의 제스쳐나 말 한마디, 이 모든 것은 정말 상대방을 위하는 진실된 마음가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얘기지만, 이런일이 반복되면 그만큼 더 친해지고, 더 친할수록/친해질수록 이런일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너무나 빨리 친해질 수 밖에 없다. 


어제도 13시간 넘게 일한 고된 하루였지만(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손이 쫙 펴지지 않을 정도로-_-)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일들 몇가지를 적어보장!

  • 파스타 스테이션에는 마지막 피니쉬를 위한 가루치즈 몇가지가 준비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다 갈고 조각내고 해서 준비해야 하는 것. 그런데 이 치즈들은 워크인 냉장고 제일 윗칸 구석탱이에 처박혀 있고, 큰 플라스틱 통에 여러가지 치즈가 들어가 있어(도합 약 15키로) 이걸 한번 꺼내려면 뭘 밟고 올라가고 힘쓰고...여튼 나에게는 보통 고생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제도 서비스 직전에 fontina라는 치즈 믹스가 떨어져 두가지의 치즈를 꺼내어 갈아야 하는데, 다른 프로젝트를 끝내고 치운 다음 자리에 돌아갔더니.... 세상에나 셰프 캔들이 본인이 필요한 다른 치즈 꺼내면서 내가 필요한 두가지 치즈를 꺼내놓아준 것이 아닌가. 것도 딱 필요한 양 맞춰서... ㅠㅠ 덕분에 나는 서비스 시간 맞춰 준비할 수 있었고 힘들게 올라가 치즈를 꺼내고 다시 넣을 필요도 없었다. 꺄오♥
    • 물론 이밖에도 셰프 캔들과는 자잘하게 친해지는 사건이 무지 많았다. 출근하자마자 오늘 잘해보자고 하이파이브를 날리더니(손 아팠다 -,.-), 갑자기 날 데리고 진공포장기로 데려가더니 시간 절약해 포장하는 법도 보여주고, 나중에는 파스타 소스 찾는 걸 도와줬더니 허그까지 날리심 ㅋㅋ 

  • 어제도 라인에 내려가 플레이팅을 했다! 역시나 신나게 배우며 일하고 있는데 중간중간 뭐가 필요할때마다 훌리오 아저씨가 얼마나 옆에서 깨알같이(그리고 귀신같이 ㅋㅋ) 챙겨주는지. 우리가 직접 나누는 대화는 hola, como estas, good night, gracias 밖에 없지만 덕분에 정이 팍팍 들고 있다. 셰프가 멀리서 뭐 갖다달라고 나에게 주문해 가지러 돌아서면 어느새 그걸 들고 서 있는 훌리오 아저씨 ㅋㅋㅋ 어제는 플레이팅 하는 것까지 보고 있다가 필요한 그릇 챙겨주심. 

  • 어제 정말 의외이자 제일 감명깊은 인상을 준 건 바로 수셰프 저스틴. 평소에 매우 sarcastic하고 살짝 4차원이고 조용하다가 드라이한 농담을 던지는, 직접적인 따뜻함은 찾아보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런데 어제 낮에 위층에서 창고정리 및 이런저런 프렙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창고 안으로 손이 쑥 들어온다. 뭔지 받아들고 보니 재료 정리하다 본인 간식 만들면서 내것까지 두개 만든 것. 안 그래도 배고팠었는데... 평소 드라이하던 사람이 챙겨주니 감동이 열배로 ㅋㅋ 벙쪄서 땡큐 소리도 못하고... 사진까지 찍었다 ㅋㅋㅋ 
벌써 인턴한지 한달이 훌쩍 넘었다. 이제 한달반 정도 남았는데 벌써 정이 팍팍 들어 끝날때 울 것 같은! 아 난 울보 'ㅁ'

그리고 어제 한 프로젝트들 정리 및 기록:

  • 레몬즙 짜기: 못생긴 레몬들로만 50개 골라서 싸그리 즙 짜버렸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닌데, 인상깊었던 점은 일한지 며칠 안되었을 때고 같은 작업을 했었는데 그땐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던 쥬서기가 어제는 너무 쉽게 들림. 푸핫.
  • 허브통 정리하기: 허브향에 취해 너무 여유롭게 작업하다 혼남 ㅋ 매일같이 시든 잎 정리해내고 새로운 타월에 말아준다. 
  • 딸기 씻어 다듬어 로스팅 할 애들과 잼 만들기 준비: 하다 작은애 하나 집어먹었는데 대박... ㅠㅁㅠ
  • Carrot puree 만들기: 역시 당근과 생강의 궁합은 짱!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근즙은 너무너무너무 좋은데 생당근은 왜 이렇게 싫은지.
  • 당근 5mm 다이스: 자투리도 얼마 나오지 않고 빨리 작업 완료.
  • 올리브 다듬기: 이것도 5분안에 완료.
  • 이런저런 재료 계량 및 서비스 밑준비. 진공포장. 더 이상 기억불가...
어제 새로 배운 플레이팅 항목:
  • 새로 출시된 애피타이저/샐러드: 토마토, 오이, 멜론과 burrata 치즈.
  • 아보카도와 방어 애피타이저
  • 초콜렛과 카라멜 디저트 (한손으로 뜨는 quenelle 연습 시급)
  • 시저샐러드
  • 푸딩/베리 디저트
  • 진짜 바쁠때는 파스타에 마무리 치즈도 뿌렸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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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 한창 일하고 있는데 오후에 어떤 남자애 하나가 스타쥬를 하러 들렀다. 곧 CIA 졸업에 (흔하디 흔하지만) 문신도 있으시고 칼도 좋은 거 있길래 쫌 하나, 싶었는데 처음 기본적인 작업은 열심히 하더니 어째 슬슬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당근 5mm 다이스를 시켰는데 끙끙대며 완전 짜증나는 작업이라고 투정을 부리질 않나, 렌즈 끼고 오는 걸 깜박했다는 (헛)소리를 하질 않나. 게다가 셰프 셰리가 당근 자투리 담을 통 가져오라 했는데 것도 바로 안 해서 결국 내가 가져오고; 알고보니 원래 내일 일하는 날이었는데 본인이 착각해 오늘 들렀고. 뭐 여튼 포인트 얻을 기회를 계속 놓치는 와중, 셰프 셰리가 당근 다 끝내면 인턴쉽 관련해서 얘기 나누자는데 9시도 안되어 돌려보내는 분위기가 영 심상찮다. 아니나 다를까, 썩소를 띠고 오피스에서 나온다. 바이바이~
    • 방학이라고 동부에서 혼자 샌프란까지 스타쥬를 하기 위해 날라왔는데 첫날부터... 안타깝다 ㅠㅠ 것도 순전 SPQR만을 위해 날아왔는데 -_-
    • 웬만하면 인턴으로는 다 채용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덕분에 자부심과 자신감 상승 ㅋㅋ
    • 알렉스는 덩달아 까임. 같은 학교 출신/후배라 기대했는데 꽤 실망했다며 셰프 셰리 한숨. 거기다 저번에 일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오피스로 불러 얘기했더니 심지어 울기까지 했단다. 어이구 우리 알렉스 ㅜㅜ
    • 그러더니 나한테 여름 후 계획이 어떻게 되냐며 여기 더 있고 싶냐고 은근슬쩍 물어봄. 비자 해결되면 풀타임 채용되는 거임?!!??!

  • 셰프 맷이 오늘도 줄기콩(Romano Beans) 다듬고 있길래 오늘 30분안에 다 다져버릴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You are the queen of these! Well, you are the queen of many things right now" 란다. 하여튼 셰프 기분 띄워주는 재주는 참 좋으심 ㅋ 여튼 요새 나의 스페셜티 몇가지:
    • 로마노 줄기콩 정확히 빨리 다지기
      • knife skills는 그래도 내가 프렙위주로 일하는 cook들 중에서는 제일 좋은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오늘 줄기콩 소스용 셀러리 (완벽한 4mm 정육면체 아이들-_-) 다지는데 셰프가 맨날 나 시간되는 토요일날 해야겠다며 씩 웃음
    • 옥수수알 이쁘게 빨리 까기
    • 버터 크루통 만들기 (오늘 빵 재단도 배움)
    • 가니쉬로 올라가는 오이 피클 만들기 (이건 SPQR에서 나만 할 줄 안다 ㅎㅎㅎ)
    • 마지막으로 나의 요새 favorite 프로젝트인 돼지고기 삶아 틀에 굳혀 테린만들기! (Pork Legs라 불린다) 오늘 간도 내가 혼자 다 맞춰 완성해버렸는데 나중에 서비스 직전 모양 다듬다 나온 자투리 먹으며 셰프 셰리가 Joowon makes such good pork legs란다. 오늘 처음으로 좀 벅차 울컥했다 으흐흐...

  • 기타 등등
    • 토니 아저씨 이젠 대놓고 잘 챙겨주는 거 생색내심. "I'm so good to you, right?" ㅋㅋㅋ
    • 로드리고 아저씨는 여전히 유치찬란한 장난을 시도때도 없이 -_-;
    • 다음주 일요일 스태프밀로 잡채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15인분 잡채라...
    • 내일 또 플레이팅 할 듯! ㅇㅎㅎ


  • 오늘 셰프 맷은 정말 무서웠다;
    • 오늘 출근해 옷 갈아입고 내려가니 chef 맷이 sous chef 셰리와 저스틴과 뭔가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우선 덱스터와 일하고 있으라는 셰프 말에 올라가서 잡다한 일 하고 있는데, 셰프가 밑으로 부르더니 오늘 나는 chef 셰리와 일할거란다. 덱스터를 직접 잡기로 각오하신 모양; 아직 해체도 안한 랍스터에 들어갈 허브는 왜 다지게 하고 있냐며 한참 나무라더니 같이 작업 시작.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및 시간분배를 잘 못해 거의 매일 혼나는 중)
    • 완두콩을 콩깍지에서 분리하는 작업하고 있는데 비닐봉지째 작업하지 말고 (it's unprofessional!) 통에 옮겨 담아 하라. 그리고 팍팍팍 스피드 있게 5분 안에 끝내자! YES CHEF @_@ 외치고 미친듯이 손을 부렸다. 5분에는 못했지만 10분엔 한 듯? ㅠ_ㅠ
    • 오후에 이런저런 작업을 하고 있으면 덱스터는 보통 냉장고 정리를 한두번씩 한다. 공간확보를 위해 여분이 있는 통에 담겨있는 모든 것들을 작은 통으로 옮겨담는 등 끊임없이 청소/정리를 해야하는데, 분명 오전에 널널널널널 하던 워크인이 오후에 이상하게 자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네시쯤 갑자기 뛰쳐 올라온 셰프가 워크인에 들어가더니 냉장고가 엉망이라며 다시 덱스터를 잡기 시작 -_-;;;; 나도 워크인에 빠짝빠짝 공간땡겨서 정리안해놓은 몇가지가 있어서 움찔하던차, 워낙 목소리를 높여 야단치는 타입이 아닌 셰프지만 나름 격양된 목소리를 덱스터를 마구 혼내기 시작했다...헐. 셰프 셰리는 중간에서 한숨 푹푹 쉬고 있고.
    • 결국 프렙작업 하던 세사람이 뛰어들어 급 냉장고 정리를 했다. 끝내고 들어가보니 아니 세상에 공간이 두배는 넓어졌다 +_+...우왕 신기.
    • 나도 내일부터는 눈여겨보면서 좀 더 적극적으로 정리에 참여해야겠다. 

  • 손이 빨라졌다!
    • 파스타 10분만에 끝냄. 덱스터가 놀램. ㅋㅋㅋ
    • 비트 20개 다지는데 15분 걸렸나? 저번에 G는 거의 한시간 붙잡고 있던 프로젝트를 30분만에 바닥에 하나도 안 흘리고 끝냈다. 으히히!!!
    • 옥수수는 이제 진짜 퀄리티와 스피드 둘다 백프로 자신있다. 3통은 힘들이지도 않고 슉슉.  
    • 오늘 마지막으로 작업한 건 파슬리 이파리 뜯기. 콜린이랑 둘이 미친듯이 손놀리니 30분도 안되어 거대한 파슬리 한박스를 다 끝냈다. 우오오!! 이건 셰프 셰리도 진짜 놀램 ㅋㅋ 
    • 셰프 맷이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바로 스피드. 물론 그렇다고 퀄리티가 희생되서도 안되지만 -_-; 뭐 가끔 더 빨리해야 한다고 채근받는 일은 있지만 마들렌이나 알렉스처럼 전체적으로 항상 너무 느리다고 구박받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어휴 -_-
      • 셰프 맷이 그래도 경험많고 더 큰 그릇의 윗 사람이라 생각되는 이유는, 아랫사람의 limit을 잘 파악하고 적당하게 자극될 정도로만 push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손질해보는 chicken liver를 다루고 있는데 단순히 속도가 느린게 아니라 너무 익숙하지 않은 재료라 힘들어하고 있는데, 아침부터 셰프 맷이 끝없이 잔소리하는 통에 덩달아 신경이 곤두선 셰프 셰리가 무턱대고 빨리빨리를 외치는 바람에 팍! 짜증과 억울함 지수 급상승. 결국 분노와 칭얼거림을 반 섞어 대꾸하니 셰리도 측은했나보다. 다시 자상모드로 ㅋㅋㅋ

  • 기타 등등
    • 상대방을 위해서 1%라도 더 해주는 것, 참 중요한 것 같다. 나에겐 1%이지만 상대에겐 정말 큰 도움과 기쁨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오고가는 와중에 쌓이는 정이란! 
    • 오늘 셰프 캔달 일하는 날인줄 알았는데 안 옴 ㅠ_ㅠ 
    • 일하다 오후 5시쯤 홀짝거리는 커피 한잔의 맛은 참...캬아!!!
    • 그래도 집에 갈때 셰프맷과 악수하고 갔다. 예전부터 Thank you, chef라 해 줬었나? 급 민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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