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나 요리할거다, 라는 말에 제일 많이 물어오는 질문이자 제일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바로 무슨 요리 할건데, 이다. 내가 요리를 선택한 이유는 음식이 가진 소통의 힘이지, 최고의 바게트를 굽거나 장을 담그는 장인이라는 목표가 아니었다. 때문에 내가 필요한 것은 나의 가치관과 스토리들을 원하는 의도대로 효과적으로 표현하게 해주는 기술이며, 최대한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것이 목표이다. 물론 현재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고 있는 학교들은 대부분 "서양"요리를 기초로 한다. 유럽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가면 물론 그 나라의 "전통" 요리를 배우겠고, 미국으로 가면 대개 프랑스 요리의 기초에 기반한 커리큘럼에다가 학년이 올라가면 간단하게나마 중식, 일식 등등도 가르치는 걸 볼 수 있다(물론 미국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미국의 식당에서 요리해내는 동양음식에 대한 시각이겠지만). 

때문에 짧은 답변은 "서양"요리이나, 어차피 아주 전통적인 프랑스나 이탈리아 음식, 혹은 한국에서 유행인 "미국식" 브런치를 그대로 재현하는데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 답변은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퓨전"이라고 답하기도 싫다. 물론 내 요리는 한 나라나 문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다양한 맛과 기술 및 영감이 복합된 음식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이 포스팅에서 피곤하고 민감한 주제인 한식의 세계화를 다룰 생각은 전혀 없지만) 결국 나는 거의 매일같이 김치와 간장을 먹고 자란 한국사람이다. 한국음식의 맛과 경험을 다른 나라와 나누거나, 새롭게 재해석해서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안겨주고 싶은 것은 내 본능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음식을 "퓨전"이라고 규정짓는 순간, 이도저도 아닌 애매모호한 마이너리그에 속한 음식이 되 버리는 것 같아 상당히 거부감이 든다. 

내가 좋아하는 요리, 그리고 하고 싶은 요리는 나라에 상관없이 맛과 깊이가 있는 음식이다. 맛있는 음식들은 많다. 그렇지만 먹고서 영감을 얻거나, 십년전 추억이 떠오르게 하거나, 집에 가서까지 관련정보를 인터넷에까지 찾아보게 하는 음식은 흔하지 않다. 얼마 전 방문한 싱가포르의 Iggy's의 pasty chef인 Andres Lara의 말을 인용하자면 "[touching] your soul" (직역하자면 영혼을 울리는 음식 정도? -_-;) 하는 음식을 만들어 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제발 어디 요리하고 싶냐고 묻지 말아달라 흑흑. 나는 빵도 잘 굽고 싶고 톳나물도 잘 무치고 싶고 스테이크도 잘 굽고 싶단 말이다. 물론 한분야에 평생을 다 바쳐 연마해도 모자랄 것이 음식이고, 요리를 적당히 할 생각은 절대 없다. 다만 내가 20년 후 전문가가 되고 싶은 분야는 음식과 연관된 엄청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소통의 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이기 때문에 최대한 다양한 경험과 기술을 쌓는 것이 목표일 뿐!

ps. 사진은 홍대 돈부리점의 간판. 뭔가 음식에 대한 소신과 관련된 사진이라 -_-...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맛집 찾아가기보다 더 우선순위는 일반 서점만큼이나 잘 구축되어있고 정리되어 있는 미국의 헌책방들에서 요리/음식 관련 서적을 가방에 넣을 수 있을만큼 쓸어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난 새 책을 사는 것이 너무너무 아깝다. 가격 떄문이 아니다. 창고에서, 혹은 헌책방에 고이 모셔져 있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빠닥빠닥한 코팅된 두꺼운 커버에 새하얀 새종이에 인쇄된 책들이 너무 낭비같아서 말이다. 

여튼, 그렇게 벼르고 가서 이번에 구해온 열몇권의 책 중 제일 기대되는 책은 (사실 새 책이었다는 아이러니와 위선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소설가인 Jonathan Safran Foer의 첫 비소설인 Eating Animals라는 책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현대 도축산업의 끔찍한 장면들을 논하며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또 한권의 책 같아보였지만, 대강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책이었다. 상당한 양의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이 책은 도축산업과 연관된 사람들, 문화, 역사에 대해 꽤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같은 카테고리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집어들게 만든 건 저자가 vegan(유제품 포함한 동물성식품을 일체 섭취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이면서 무려 도살장에서 일하는 인부들과도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몇 페이지만 읽었지만, 오늘 새로 발견한 bluexmas님의 블로그에서 푸아그라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구절을 읽고 갑자기 삘 받아서 포스팅하게 되었다. 나도 사실 푸아그라 안 줘도 그만이다. 웬만해선 맛있고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나, 갑자기 한밤에 먹고 싶어지는 그런 존재는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코스요리에 푸아그라가 나오면 신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걸 주고 덜 비싸게 받지, 라는 생각을 하는 일인. 

무엇보다 푸아그라의 목넘김이 힘든 이유는 푸아그라가 만들어지는 과정 때문이다. 거위를 강제로 폭식(force-feeding)하게 만들어(뭐 깔대기를 꽃아 대량의 사료를 위로 바로 투하시키니 "식"이라 하기도 어렵겠지만) 살찌운 간이 바로 푸아그라인데[각주:1],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이걸 먹어야 하나, 라는 맛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걸 알고 난 후에는 먹을때 드는 일말의 죄책감과 찝찝함에 100% 즐길 수가 없다. 

푸아그라의 상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이집트 벽화.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푸아그라 외에도 육식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여러 다른 동물들을 거쳐갔다. 여기저기서 접한 사진들이나 기사들 때문에 반년간 소/돼지/닭고기를 멀리한 적도 있었고, 참치에 대한 마구잡이 어업의 횡포에 대해 읽었을 땐 소비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절대 참치초밥은 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들은 정확한 근거나 가치관은 커녕 단순히 그때그때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들로 인한 것이었고, 카드값이 여유있는 달만 유기농 유제품을 구입하는 위선적인 내 잣대는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육식이 의미하는 것과 나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고찰한 적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만 까탈스런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도 싫었고, 굳이 설명을 하기도 귀찮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맛있는 갈비와 참치뱃살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때문에 이 쪽 산업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면 왠지 죄책감이 더 커질 것만 같아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래 인생은 짧은데 즐겨야지, 라는 모토와 가끔씩만 먹어주고, 먹을 때는 최대한 환경/동물 친화적인 재료를 선택한다는 단순한 합리화 -- 왠만한 사람들이 말없이 수긍하고 인정할만한 잣대--로 지내왔다.

하지만 이 주제는 점점 밀리는 방학일기처럼 마음 한켠에서 계속 불편함을 제공했고, 요리를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부터는 개학 전날밤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재료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많은 지식과 확실한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이유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 그 결심의 첫걸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몇 장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상당히 기대가 된다. 저자는 매우 위트있게 불편하고 민감한 주제를 아주아주 원론적인 질문부터 소화하기 쉽게 다뤄나간다. 언제부터 우리는 육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들이 있었는지, 푸아그라용 거위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마블링을 위해 꼼짝 못하는 소가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비교해서 도대체 어쩔건지, 일반 양계장의 닭과 들판을 뛰놀며 자란 닭은 정말 다른지 등등의 다양한 질문을 심도있게 다룬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과 가치관에 대한 논란을 떠나 음식과 문화/역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뼈대로 잡고 얘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ps. 이 책을 읽고 나서 편한 마음과 확실한 소신으로 계속해서 육식을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욕심이자 이기심이지만 여전히 (더) 불편한 진실로 남을지도 몰라 좀 두렵다 -_-


  1. 엄밀히 얘기하자면 force-feeding으로 사육되는 거위가 아니면 프랑스법에 따라 foie gras라고 부를 수 없으나, 일부 생산자들은 자연적인 사료섭취, 혹은 거위의 간이 자연적으로 제일 커져있을 때를 골라 도살하는 방법등을 통해 "foie gras"를 만들고 있다. [본문으로]
2011년 첫날은 계획했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 주니와 단둘이 보내게 되었다. 전날밤 느지막히 집에 들어와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우리 제빵왕 탁구가 우수상 타고 펑펑 우는 것도 보고 티비에서 틀어주는 타종소리를 들으며 연중행사인 남산 하얏트 호텔의 불꽃놀이 구경 후 바로 곯아떨어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도 새해 첫날 아침인데, 깨끗이 목욕재개하고 라면이나 식은 밥 대신 뭔가 제대로 된 프레시한 음식을 섭취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연말에 손님맞이 몇 번 한턱에 너저분한 주방부터 치우기 시작. 설거지를 하다 보니 이리저리 때가 낀 토스터며 주전자며 오븐이 눈에 들어온다. 이왕 하는 거 싱크대도 개수대도 한번씩 닦아줘야 할 것 같아 철수세미와 클리너를 주섬주섬 꺼냈다. 


대강 한번 치우고 나니 두시간여가 훌쩍 흘렀다. 완전 배고프다. 얼른 그냥 끼니를 때우고 싶은 귀차니즘이 몰려왔으나 그래도 1월 1일인데, 하며 마음을 다잡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보름 넘게 사람없이 집이 비어있던터라 유통기한 지난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상해보이는 반찬. 찰랑찰랑 남아있는 우유 한통. 문드러진 -_- 부추 한 단. 

눈에 띄는 것들을 버리고 나니 냉장고에 상당히 오랫동안 살고 있던 소스병들이 찝찝하다. 음, 역시 마요네즈는 버릴때가 되었군. 겨자도 간당간당하다. 아, 그러고 보니 냉동고도 있다. 묵혀두었던 쿠키반죽에 얼린지 일년 다 되가는 새우 몇 마리, 언제부터 냉동실에 상주한지 절대 알 수 없는 미숫가루까지. 


으아 속이 다 시원하다. 싹 비워내고 나니 쓸만한 재료들이 보이나 참 랜덤하다. 두부 반 모. 양배추 반 개. 당근 두 개. 양파 하나. 얼린 소고기 조금. 메추리알. 청양고추. 오뎅 반팩. 스파게티와 마카로니 반봉지씩. 거기다가 칠리용 콩 한캔. 푸핫... 


오뎅과 양파, 튀긴 두부를 볶고 메추리알과 청양고추는 간장에 졸이기 시작. 칠리용 콩은 양파, 당근과 양배추, 고기를 다져서 넣고 간만에 칠리를 만들었다. 체다치즈가 없는 것이 눈물나게 아쉬웠지만. 그리고 부엌에만 들어서면 오븐 돌리고 싶은 이 어쩔수 없는 본능에 남은 밀가루 탈탈 털어 빵 반죽도 시작했다. 청소는 다 해놓고 귀차니즘으로 인해 메치지 않아도 되는 5분빵으로. 

깨끗한 부엌에 반죽 발효 시켜놓고 반찬 싹 해서 차려놓고 나니 뭔가 제대로 새해를 시작하는 느낌. 2011년은 항상 이렇게 개운하고 정리된 마음이길!


ps. 떡국 아직 못 먹었다 -_-... 난 아직 스물일곱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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