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재료의 환상궁합

요리단상 l 2012. 1. 8. 10:02
재료들의 궁합을 맛과 전통/문화면에서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한데, Flavor Bible이나 Culinary Artistry란 책을 보다 보면 "Match made in heaven"이란 표현을 쓴다. 천생연분이란 얘기.

그 중 하나는 돼지와 김치 아닐까?(김치를 하나의 재료로 볼 순 없지만) 난 삼겹살보다 같은 불판에 굽는 김치와 마늘이 더 별미라 생각한다. 가끔 고깃집에서 종업원분이 불판 갈아주면서 애써 정성스레 구워놓은 마늘편이나 김치를 훅 가져가버릴때가 있는데 그럴때마다 가슴이 찢어짐.

오늘 저녁은 남은 김치 쫑쫑 썰어서 마늘편이랑 돼지기름에 슉 볶아 찬밥 투하. 돼지기름은 예전에 베이컨 구우며 남겨두었던 것. 여기에 진짜 삼겹살 몇 점과 참기름 살짝만 있었다면... 깻잎도... 


ps. 계란후라이 실력 좀 늘었다고 방심하다 노른자가 터졌다. ㅜㅜ 

초등학생 때였나, 친구와 친구 부모님과 스키장을 가던 어느 겨울날, 스키장 근처 한 밥집에 들어갔다. 나로썬 처음 접해보는 우거지국. 그 구수한 된장과 은은하게 느껴지는 배춧잎의 달달함이란...

이제 영하권에 접어들며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된 한 주, 우거지국 생각에 눈물지새다 갑자기 우거지와 시래기의 차이점이 궁금해졌다. 우선 사전적 의미부터.(출처는 네이트 국어사전)

우거지
[명사]
1. 푸성귀를 다듬을 때에 골라 놓은 겉대. 
2. 김장이나 젓갈 따위의 맨 위에 덮여 있는 품질이 낮은 부분. 

시래기
[명사]무청이나 배추의 잎을 말린 것. 새끼 따위로 엮어 말려서 보관하다가 볶거나 국을 끓이는 데 쓴다.

우거지와 시래기 둘 다 김장할 때 나오는 여분의 이파리들을 사용하는 것. 시래기를 말리기 전 삶는지 않는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하겠고... 우거지는 2번 정의에 나오듯이 염장된 배춧잎인데, 냉장기술이 없던 옛날, 김치를 독에 보관했고, 추가적인 보관효과를 위해 소금을 두둑히 덮어두었다. 그런데 김치 바로 위에 소금을 얹으면 수분이 많은 김치에 그대로 일부 녹아내리고 염도가 컨트롤이 안되니 배추 겉잎으로 먼저 덮고 그 위에 소금을 올렸단다. 근데 김장 다 먹고 다면 이 겉잎들만 남는데, 소금으로 인해 자연히 염장이 되고 이를 물에 헹궈 요리에 사용.

요새처럼 딤채까지 있는 시대에는 굳이 우거지가 필요없기에 일부러 겉잎을 따로 모아 데치고 염장해서 우거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이렇게 버리는 이파리 하나 없이 몽땅 유용하게 쓰는 선조들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 'ㅁ' 

ps. 관련해서 에피소드 하나. 얼마전 수업에서 한 셰프가 데쳐 벗긴 토마토의 껍질을 멋진 가니쉬로 변신시키는 팁을 알려줬다. 왕짠돌이 프랑스 셰프가 가르쳐 준거라며 ㅋㅋㅋ 벗긴 토마토 껍질을 섭씨 120-30도의 아주 낮은 온도에서 서서히 말리면 투명한 다홍 유리조각처럼 멋드러지게 된다 :) "쓰레기"를 예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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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현상이지만, 요새처럼 인생 통틀어 이렇게 음식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먹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재밌는 게, 더 많이 알게 되면 될수록 한식에 대한 탐구심과 향수병이 커지는 거다. 

딱 1년전(신기하다 -ㅁ-) 내가 하고 싶은 요리는? 이란 포스팅을 올렸었다. 문화에 너무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조리기법과 재료사용을 하고 싶으며, 그렇지만 퓨전음식이란 간판을 달기는 싫은 그런 요리. 그렇지만 요새 슬슬 한식의 발전에 이바지해보자, 라는 무모한(?) 도전정신이 들고 있다. 

바로 그 계기는 맨하탄에서 시작.

크리스마스라 친구네 가족과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정신없어서 가져갈 파이도 못 만들었고, 에라 뉴욕 들렸다 가니 그냥 사가자는 계획. 이왕이면 한국적인 걸 사가는 게 좋을 것 같아 한인타운(정확히 하면 한인거리;)에 들렸는데.................참 암담했다. 뭐 완전 전통화과나 떡은 어차피 서울에도 때깔만 좋은 녀석들이 많으니 녹차롤케잌정도에서 쇼부를 볼 예정이었다. 그런데 차마 "PARIS BAGUETTE"가 찍혀있는 녹차롤을 사갈 수는 없었다.(이건 나중에 별개 포스팅으로 분개할 예정이지만 파리바게트 뉴욕점의 존재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그들은 크리스마스라고 미리 주문받아 전날 열심히 대량생산한 케잌들을 번호표 받고 배분하는 중이었음) 

랩 씌운 스티로폼 포장의 떡(쌀 성분도 의심)을 사갈수도 없고, 그나마 한국스러운 이름의 고려당에서 파는 빵들은.....................................

누가 가스불과 후라이팬만 빌려줘도 깨강정스러운 것이라도 만들어 갔을터인데 ㅜㅜ

여튼 그때 랩포장떡과 전통화과 사이의 갭을 절실히 깨닫고 미국에서 뭐 해볼까, 하는 중, 한국정부의 진부하고도 진부한 한심한 한식 세계화 관련 글들을 읽으며 깨달았다. 한국에도 맛있는 한국음식이 없는 걸 말이다. 뭐 널리고 널린 백반집과 고깃집들, 비싼 고급한정식 집들은 많아도 정작 정말 좋은 재료와 정성으로 한식의 발전을 도모하는 음식점이 몇군데나 있던가? 

이태원에서 이스트빌리지 운영하고 계신 권셰프님의 블로그를 읽다보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절히 느껴진다. 점점 빠른 서비스와 자극적인 맛을 찾고, 건조면+캔토마토+냉동해산물+조미료는 거뜬히 2만원 이상 지불하면서 칼국수가 만원이라면 생난리를 칠 소비자들과 기반이 흔들리고 계속 악재가 겹치는 한국 농업. 깔끔한 인테리어에 들어왔다가 메뉴가 한식인 걸 보고 나가는 손님들이 있는 문화에서 요리사들 몇명이 혼자 아둥바둥하며 발전을 도모하기에는 역부족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문화에는 혁명이 있었고 그걸 이끈 사람은 항상 소수의 개개인이었지 않은가? 우후훗 

전체적인 한식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먹거리에 대한 의식과 서포트, 요리사들의 현대적인 식재료와 조리법 연구, 정부의 식재료 유통과 개선에 대한 노력과 서포트(요새는 거꾸로 가지만 ㅜㅜ)가 모두 맞물려야겠지만... 한국에도 코리안버전 모더니스트 쿠진과(번역말고) 딘앤딜루카 대신 한국식재료로 꽉꽉 채운 이탤리(Eataly)같은 곳이 생기는 그날까지!!!

ps. 이 자리를 빌어 내 인생 평생 미원 한 톨 없이 밥해주신 우리 엄마와 생전 손수 순대를 빚어주신 함경도 출신 우리 노할머니께 진심으로 감사를. 덕분에 제 입맛은 썩지 않았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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