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즐겨보기 시작한 팻투바하님의 맛집 블로그, 역시 배가 고파지는 점심시간 전에 보다가 [커피번개]라는 말머리의 포스팅. 국내에 들어오기 매우 힘들다는 파나마의 에스메랄다산의 "게이샤" 원두를 맛볼 수 있는 기회란다. 늦은 저녁에 시작하는 번개였지만 커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후 늦게 마시고 찾아오는 두통이나 불면증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 자리있다는 말에 냉큼 신청하고 서래마을로 달려갔다.
아주 예전 파스타를 먹으러 들렸던 기억이 있는 서래마을 시실리, 그동안 파스타와 커피를 같이 한다더라,는 말만 무성히 듣고 다시 찾아볼 기회가 없었다. 회사에서 허둥지둥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30분 가까이 늦는 바람에 민망한 마음으로 얼른 2층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앞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던 카리스마 작렬의 한 남성분이 "일부러 아직 안 마시고 기다렸습니다"라는 말에 죄송한 마음이.
알고보니 그 분은 시실리의 오너 바리스타, 무려 커피 경력 17년이신 권대옥 사장님이셨다. 어쩐지 포스가 정말 강렬하셨단. 내려주실 커피가 더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커피냄새가 아니라 커피향이라 조금은 미안해하시면서도 몇번씩이고 강조하시던 사장님. 이런 이유있는 의견과 주장이 있으신 분들 너무 좋다.
이날 시음의 첫 커피는 이티오피아 시다모 네키스 (Ethiopia Sidamo Nikisse).
이전 커피 관련 포스팅들에서도 언급했지만 커피는 여러 나라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와인과 마찬가지로 원산지와 커피나무, 즉 원두의 종류에 따라 커피의 맛과 향기가 다르다. 때문에 이 커피의 이름은 네키스이지만 앞의 이티오피아 시다모는 이 원두가 재배된 곳을 알려준다.
한잔한잔 정성으로 내리는 핸드드립 추출을 위해 원두가 갈리자 달콤한 커피향이 순식간에 번져왔다. 그리고 사장님의 입이 떡 벌어지는 드립법. 시작하시기 전에 추출법은 원두에 따라 다르게 결정하시는지 등등 내가 아는 용어를 총동원해 여쭤보니 원추형 동드립퍼를 사용하는 오랜 기간에 거쳐 직접 개발하신 드립법. 아으 난 언제 저런 내공이......
열사람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다 핸드드립으로 마시려니 조금 시간이 걸렸다. 네분이 드시고 드디어 내 차례. 이미 마시기 전에 사장님의 설명과 다른 분들의 소감을 들었지만 내가 과연 이 진하다는 커피에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단순히 그냥 쓰다고만 느끼지 않을까 잠시 걱정이 되었다. 아직은 가벼운 이르가체프가 내 입맛엔 더 맞던데 말이지.
긴 기다림 후 드디어 내 차례. 잔이 참 은은하니 곱다.
한모금을 입에 머금은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 순식간이지만 분명하고 화려한 맛의 향연. 자몽, 레몬의 신맛으로 시작해 좀 더 싱그러운 꽃향기로 바뀌고, 마무리는 달콤하고 깔끔한 초콜렛과 약간의 고소한 카라멜향.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다니!
맛있는 커피는 온도변화에 따른 맛의 변화를 느끼는 것도 매우 재밌다. 맛없는 커피는 식어버리면 정말 먹을 수가 없는데, 오히려 맛있는 커피는 약간 미지근하게 즐기는 것이 더 좋을 정도로 달달함과 신맛등이 확 살아난다. 그렇지만 이 커피는 너무 맛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온도가 되기 전에 다 마셔버림 꺄아.
한잔 마시고 가득 취해 있는데 두번째 커피가 있단다. 아 맞다 원래 게이샤 테이스팅 하러 온 것이었지. Duh.
두번째로 맛볼 커피는 파나마 에스마랄다 게이샤 (Panama Esmeralda Geisha).
SCA (Specialty Coffee Association), 즉 스페셜티 커피 위원회에서 무려 백점이란 어마어마한 점수를 받은 "게이샤" 원두는 남미 파나마의 에스마랄다에서 재배되는 원두. 어딘지 전혀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을 위해 다시 지도 삽입.
이번에 권대옥 바리스타의 지인이 경매에 성공한 노고로 한국에 들어온 이 원두는 무려 영국 왕실에까지 납품되었다 한다. 경매에 실패한 왕실 직원들, 짤렸을지도 모르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며 드립 준비. 진짜 우리가 대신 마셔도 되는 건지 약간 미안했음 으흐흐.
아까보단 좀 더 밝은 원두의 색. 역시 내려지는 커피의 색도 좀 더 연한 붉은 갈색이었다. 역시 침을 삼키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음..................
커피에게 스폿라이트를 내주는 깨끗하고 정갈한 하얀 잔.
게이샤는 네키스와 완전히 달랐다. 조금 더 차분하고 무게있는, 거기에 쥬스처럼 신맛이 강하면서도 끝에 이어지는 단맛. 커피원두는 보통 로스팅을 진하게 하면 할수록 쓴맛이 진해지는데 이 원두는 연하게 로스팅을 했다고는 믿기 힘들정도로 강했다. 거기에 군고구마 향도 나면서 굉장히 정돈된, 그러나 강하고 깊은 맛을 선사했다. 아까 너무 빨리 마셔버려서 이번에는 일부러 쉬어가며 조금 천천히.
평소에 가벼운 커피를 즐겨마시던 나로서는 이렇게 강한 커피들을 마지막 한모금까지 즐겁게 마셨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거기다 이날은 커피세계를 비롯해 얼마나 앞으로 배울 것이 많은지, 얼마나 더
겸손해져야 하는지 새삼 느끼게 된 날이다. 주최해 주신 팻투바하님부터 같이 참가하신 다양한 분들,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주신 권사장님까지, 진심으로 감사한 인연들.
ps. 전공을 정말 뭘 해야할지 갈팡질팡이다. 아예 커피로 올인? 제빵? 제과? 시작은 그냥 요리? 으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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