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일간은 주방(혹은 조직)에서 일하는 기본 자세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일한지 일주일이 넘어가면서 기본적인 절차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던 무렵, 새로운 인턴이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유명한 셰프의 딸이. 유일한 인턴으로 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나로서는 새로운 팀원이 들어왔다는 반가움보다는 내 입지가 좁아질 듯한 위기감과 텃세심에 사로잡혔다. 시키는 일이면 무조건 신나게 열심히 하던 나는, 내가 조금이라도 더 중요한 일을 맡는 것에 대해 굉장히 민감해졌고, 내가 해보지 않은 프로젝트들이 다른 인턴에게 넘어가는 걸 보면 그렇게 심란할 수가 없었다. 특히 내 바로 위 프렙쿡이 (내가 보기에) 소위 "말단" 잡일들은 나한테 맡기면서 그녀에겐 좀 더 재밌어 보이는 일들을 맡길 때면 마음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나는 경계심, 질투 등 아주 부정적인 감정들 때문에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했고, 내가 좀 더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일들을 잘 나누지 않았다. 하루는 일을 다 마치고 둘다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나는 일층 라인에 붙어서 다른 셰프들이 마감하고 정리하는 걸 끝까지 도우며 내가 그래도 좀 더 많이 먼저 라인일을 배우고 있다는 자위를 했다.
그러던 다음날, 일층에서 헤드셰프와 여러가지 프로젝트들을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잠깐 위층에 올라간 사이, 프렙쿡은 나한테 진공포장거리를 한박스 던져주었고, 그녀는 노가다이긴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재료를 만질 기회가 주어졌다. 그 상황에서 마음이 그렇게 흔들릴수가! 내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나 민감해져있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일층에서 나름 불을 다루는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훗, 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는데, 나는 몇가지 "잡일"을 더 념겨받은 대신 들어온지 3일째 된 그녀는 밑의 샐러드 스테이션에서 일을 돕는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냥 밑에서 구경만 할거야. 설마 나도 못 잡아봤는데 플레이팅을 하게 해주겠어.
그렇지만 불길한 예감이 항상 적중하듯이, 내가 내려갈때마다 그녀는 뭔가 굉장히 재밌어 보이는 일을 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플레이팅에도 손을 대고 있었다. 2층으로 다시 올라오는데 일하면서 처음으로 서러움이 확 밀려왔다. 그래, 뭐 겨우 일주일 차이로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그리 유명한 셰프인데 경험도 나보다 많겠지. 그렇게 급히 마음을 달래보았지만 왠지 차별을 당하는 듯한 억울함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계속해서 치고 올라왔다.
계속해서 꾸역꾸역 마음을 달래가며 마지막 프로젝트를 마치니 아직 8시반경이었다. 급히 뭘 가지러 올라온 수솁한테 일 다 끝내면 라인에 내려가서 구경해도 되냐 하니 (주방이 워낙 좁아) 상황보고 알려준다며 또 급히 사라졌다. 좀 더 친한 라인쿡이 2층으로 또 급히 올라왔다. 슬쩍 상황을 물어보니 지금 밑에 전쟁이라고, 그냥 2층에서 마감하고 퇴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역시 급히 사라졌다.
아 속상해. 눈물이 찔끔 났다.
눈물을 급히 훔치는 와중, 수솁이 다시 올라왔는데 F word를 섞어가며 중얼거리는 게 헤드솁이랑 한판한 분위기다. 갑자기 혼자 냉장고 청소를 막 하면서 이것저것 도와달란다. 스트레스를 받는 수솁을 보니 왠지 안쓰러우며 불만과 슬픔이 사그러들었다. 나도 옆에서 도우며 평소에 닦고 싶었던 가스렌지와 서랍 구석구석을 박박 닦았다.
그러다 보니 내 모습이 갑작스럽게 반성이 되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먼저 나서서 해야 하는데, 열등감과 자존심에 사로잡혀 일을 가리다니. 누가 더 잘나고 못나서 라인에 내려갈 기회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배워야 할 기본 작업들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이리 욕심이 생기고 마음이 급해지다니. 무엇보다 요리하면서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간다고 자랑스러워 하던 내가, 이렇게 흔들리고 불안해 하다니. 그간은 단지 요리 자체에 대한 기술, 지식, 철학 이런 것들에 대해 고민했던 나날들이 대부분이었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레시피와 재료를 다루게 되며 약식이지만 멀티코스 저녁을 서빙하며 소위 말하는 기본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좀 더 남아 청소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저 치우고, 라인쿡들이 필요한 것 몇가지 더 챙겨준 후 짐을 챙겨 퇴근준비를 했다. 식당을 나서며 헤드셰프에게 인사를 하는데, 역시 평소처럼 씨익 미소를 지은 후 악수를 청한다. 굳은 악수를 나누고 집에 가는 길은 마음이 편했다. 버스를 타고 가며 오늘 일에 대해 생각해 보는데, 앞으로 이런 상황들이 얼마나 잦을테며, 내 자신과 경쟁하며 묵묵히 내 길을 걷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다. 그 와중, 갑자기 예전에 읽은 Daniel Boulud 셰프의 책 한 구절이 생각났다 ㅡ "Leave your ego in the locker room".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정말 100%의 최선을 다하고, 내 일을 챙기기 보다는 주방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해 먼저 달려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