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야밤에 닭 잡기

요리단상 l 2010. 4. 24. 22:57
요새 양식 조리 자격증 실기 준비한다고 난리다. 그 중 가장 익숙하지 못한 것은 역시 다뤄본 경험이 제일 적은 생닭과 생생선 다루기. 그래서 주말 전부터 닭 포뜨기 연습한답시고 목우촌 닭 한마리 사놓았다.

금요일 밤에 느지막히 집에 들어와 유희열 아저씨가 오랜만에 생각나 티비를 틀었더니 엥, 기다려도 기다려도 뜨질 않는다. 인터넷 뒤져보니, 웬걸, 결방? 아니 막장 드라마들은 버젓이 방송하면서 왠 음악프로그램을 결방시키니. (개콘도 이제 4주째 결방중이라 완전 짜증나 있음)

갑자기 할 일 없어져 사놨던 닭 잡았다. 시작시간 오전 영시 삼십사분. 목표 시간 십오분. 타이머까지 준비함.

뭔가 야시시해 보이는 푸르딩딩한 미스터 생닭

...십삼분 사십이초 후.


가죽과 살만 남았다.

호러영화 찍은 기분. 쩝.
난 보통 먹는 닭소돼지살코기 및 회를 포함한 해산물류 이외에 다른 부위들이나 동물들을 그렇게 찾아다니면서 즐겨먹는 편은 아니다. 곱창도 작년에 처음 먹어봤고 아직도 몇 점 이상 잘 안먹으며, 남들이 눈에 불을 키는 족발이나 좀 더 매니아적인 닭발도 우와 맛있겠다 침 뚝뚝의 리액션은 전혀 없으니. 완전 미식가이셨던 아버지 덕택에 순대집 가면 나오는 온갖 종류의 절대 뭔지 알 수 없는 고기류들을 어릴 적 부터 접해보긴 했으나 역시 침 뚝뚝은 아니다. 때문에 친구들 만났는데 곱창집 가자 그러면 마음이 무거워져서 어흐흐...(우리 그냥 삼겹살은 안되겠니)

그렇지만 작년말, 요리에 좀 더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면서부터 소금을 맛만보고 비교할 수 있는 셰프들이나 어릴 적 산속에서 온갖 풀과 약초를 다 뜯어먹어 본 산당 임지호 선생 등의 얘기를 접하게 되니, 이건 정말 닥치는대로 다 먹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마침 작년말, 회사에서 아주 퍼펙트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바로 북경 출장. 다음과 같은 사진들 블로그에서 많이들 보셨겠지?


 역시 중국에서의 열흘간 출장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음식점들의 메뉴는 전부 크기도 두 팔로 펼쳐들어야 할만큼 크고 무겁고, 앞뒤로 사진까지 빽뺵히 스무장에 야채 요리만 수십가지가 기본인 거의 '음식사전' 수준이었다. 자주 본(먹지는 못하고...) 아이템은 돼지 귀, 거위 곱창, 소 혀, 해마 정도? 으허허.

열흘 중 제일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페킹덕(Pecking Duck), 베이징 오리로 잘 알려진 오리구이를 먹으러 유명한 체인점을 갔었을 때였다. 난 단순히 오리고기와 반찬 조금 정도를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웬걸, 오리 을 먼저 에피타이저로.


뭐, 이 정도는 고급 프랑스 요리에 자주 등장하는 푸아그라랑 똑같지 뭐, 라고 한 점 덜어놓고 야금야금 하던 중 다음 녀석 등장.


고기 같긴 한데 호두 같이 생기기도 했고 무슨 열매 같이 생기기도 해서 옆의 친구에게 물어보니 오리 심장.

그리고 드디어 오리 살코기(껍질 20%). 원래 먹으러 온 거였는데 잠시 잊고 있었음.


그리고 요로코롬 오리 기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게 껍질만 서빙.(지방은 맛이 굉장히 잘 배어 들기 때문에 동물성 지방은 다 특유의 맛이 있다. 요리할때 기름 선택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


다음 타자. 크억 이것은 무엇이냐. 


오돌도돌 아주 씹히는 맛이 예술이게 생긴 다름 아닌 오리 . 그렇다. 오리 발을 닭발처럼 쪽쪽 빨아먹는 것도 아니고 저며서 통째로 씹어먹는다.

그리고 제일 대망은 차마 호러물로 분류될까 사진을 올리지 못하는..................

오리 머리다. 부리도 그대로 있고 심지어 반으로 뚝 갈라서 를 먹으라고 내놓는다. 그나저나 생선머리는 아무 느낌 없는데 오리 머리는 수줍어(응?)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손톱 만하게 올린다. 클릭하시면 원본 사이즈 나온다. 난 경고했다구)


결국 친구들의 푸쉬와 전문가가 되려면 이 정도야, 라는 과시욕 플러스 용기 플러스 압박이 가해져서 하나씩 다 먹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오리 혀(으하하하)를 먹고난 후에는 정말이지 오리 한마리가 식도를 타고 꽥꽥대며 올라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영화 '에일리언'의 인간 몸에서 에일리언들이 알깨고 나오는 장면을 볼때 드는 그 기분 말이다. 꺄아아. 다행히 옆에 있던 이과두주 한 잔으로 속을 달랬다.(50도 알콜에선 다 죽잖아, 그지?) 입가심하라고 찐한 오리 육수 혹은 엑기스 한 그릇 주긴 했는데, 뱃속에 들어가면 진짜 오리를 살려내버릴 성수 같은 느낌이어서...

사실 맛은 꽤 괜찮았다. 그리고 전부 처음 경험해 보는 맛이고 텍스쳐이고, 뭐 요리 공부에는 당연히 도움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 선은 어디일까 궁금해진다. 더 많이 먹을수록 더 많이 안다라는 것이 유일한 진리일까? 그나저나 누가 처음 오리발을 먹어보자 생각했을까 도대체. 보통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냥 에이 정말 배고팠을거야, 가 이유일까나. 정말 바나나나 사과 정도 외에는 도대체 저걸 왜 먹기 시작했을까 항상 궁금하다. 

여러분이 여태껏 먹은 것 중에 제일 새로웠던(or 쏠렸던) 건 뭐였는지?

칡뿌리와 수타면

요리단상 l 2010. 4. 19. 21:32

어릴 적에는 책 읽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전까지는 자기전에 네다섯권씩 머리맡에 쌓아놓고 등 하나 켜 놓은채  늦게까지 책을 읽다 학교에 지각하는 것이 굉장히 잦았다. 그 중 제일 좋아했던 책들 중 한권은 Laura IIgals Wilder(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시리즈의 첫 권인 Little House on the Prairie(초원의 작은 집)였는데, 정확히 세 본 적은 없으나 아마 일백번이 넘게 읽도록 읽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세계 전집으로 접하신 분들도 꽤 있겠지만, 간략히 내용을 설명하자면 아버지 어머니 딸 셋으로 이뤄진 미국의 한 가족이 서부로 이주하면서 초원에서 집짓고 밥짓고 농사짓고 우물파고 소기르며 말타며 사는 알콩달콩 모험기이다.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이 얘기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의 셀러가 되고 내가 백여번씩 읽은 이유는 일상적인 것들을 굉장한 디테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직접 벤 나무를 일일이 반으로 갈라 바닥에 깔아 근사한 마루를 만든 후 또 일일이 손으로 훑으면서 나무가시가 없도록 확인하는 일이라던지, 직접 우유를 짜 몇일에 걸쳐 저어주며 당근즙을 짜 넣어 버터를 만든다는 일이라던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마루, 버터, 문, 우물, 옥수수가루 등등을 직접 창조해서 장만해 가는 스토리 한 문장 한 문장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고, 머릿속에 그 장면들을 그리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희열과 기쁨을 느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라면서 나에게 직접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최고의 관심사였다. 집에서 어머니가 케익을 구울때면 귀찮으리만큼 옆에 붙고 끼어들었고, 학교에서 제일 재밌는 수업은 토마토를 키우고 바느질을 배우는 가정 시간이었다.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누가 직접 고추장을 담구거나 치즈를 직접 만들었다는 포스팅을 발견하면 옛날 '초원의 집'을 읽을 때와 같이 완전 흥분하는 것은 예사. 방학때는 대부분 두유 만들기, 두부 만들기 등의 실험을 하며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직접 만들어 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냐고? 글쎄, 그러게 말이다. 슈퍼에 가면 이미 다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고 포장도 되어 있고 두부 한 모에 십만원씩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마 전 잡지를 읽다 너무 고마운 칼럼을 발견했다. 아마 한겨레였던 것 같은데, 이찬웅 씨라는 박사과정을 준비하시는 분이 쓰신 '칡과 커피'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저자가 어렸을 적 전근간 시골의 학교 친구들은 정확하게 주변과 뿌리의 겉만 보고 달달한 칡뿌리가 어떤 건지 금세 알아낼 수 있는 '감성'이 있었고, 그건 절대 쉽게 몇 번의 연습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친구들은 단순히 이미 수확되고 다듬어지고 포장된 칡뿌리밖에 접한 적이 없는 아이들과 달리, 그 이상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훌륭한 글을 망치기 전에 한 문단 인용을 하도록 하겠다(사실 귀찮음...응?):

커피는 브라질·콜롬비아 어느 고장의 것이다. 뛰어난 감성은 그곳에 가닿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상품화 때문이다. 상품화는 이익을 내기 위해 선을 분절한다. 재배와 소비는 직접 연결되지 않고, 농장·하청·착취·수입·유통·광고·판매·할인 등으로 조각난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 원두커피를 매장 테이블에 늘어놓고 원주민들의 사진을 원용하면서 조각난 선을 상상적으로 연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분절된 연쇄의 끝에 대도시가 있고, 도시는 상품의 출력 단자로 포위된다. 그에 맞춰 소비자의 감각은 입력에 반응하는 단말기에 가까워진다. 이런 경우 단말기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더라도, 그것은 감성의 수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문단을 읽는 순간, 난 무릎을 탁 쳤다. 난 단순히 맛있는 커피의 은은하면서도 다크한 스모크와 초콜렛 향을 느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빈이 익어가는 농장의 모습, 수확하는 인부의 모습, 상업화로 인한 폐해, 공정거래의 시스템과 중요성 등을 함께 느끼며 그 선들을 이어가고 알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저녁은 직접 만든 손칼국수. 면을 우리밀과 정수기 물, 천일염으로 직접 반죽하고 원하는 굵기와 길이대로 재단하면서(이것도 직접 만드는 것의 대단한 장점이다) 엄청 뿌듯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랑스러운 마음에 인터넷 서핑을 좀 하고 있는데 평소 내가 즐겨읽는 블로그 쥔장 밥 아저씨 왈, 파는 밀가루들이 맘에 들지 않아 직접 밀을 갈아 파스타를 만들었다..........난 이제 밀을 직접 재배해야 하나?

참, 국수 직접 밀면 농담 아니고 몇십배백배천배 더 맛있다. 진짜 비교 안됨.



지난 9일, 자신의 발 사진으로 유명한 발레리나 강수진의 갈라쇼를 보러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에 다녀와줬다. 공연 전 엘레강스한 옷차림에 좀 어울리지 않는 백년옥에서 두부비빔밥과 녹두전을 배불리 먹고 나니 공연중 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배에 힘을 주고 오랜만에 신어준 구두를 또각거리면서 오페라 극장으로 들어가니 그 안은 이미 수천명의 사람들로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아까 비빔밥의 고추장 기운이 입안에 맴돌았다. 젠장, 파스타를 먹을걸. 백을 뒤지며 껌을 열심히 찾고 있는데 종소리가 들리며 불이 어둑해지더니 순간 공연장 안은 암흑과 정적으로 가득찼다. 그 고요함 속에 부스럭대며 껌 종이따위를 깔 자신은 없어 그대로 껌을 손에 쥔채로 동작정지. 


공연 연출이 어둠을 너무 즐기시는지, 뭔가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오프닝이 터져주려는지, 기다림이 길어지자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터져나오고 사람들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껌을 재빨리 입에 까서 넣어주고) 그 드라마틱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해이해지는 집중력을 달래며 열심히 앞쪽을 응시하고 있던 찰나, 1층에서 반딧불떼처럼 하나 둘씩 켜지는 핸드폰 조명들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흘렀다. 순간 무대위에 무언가가 나타났고, 재빨리 고개를 들었으나 내가 기다리던 그 순간은 이미 놓쳐버렸고. 공연 내내 계속되는 핸드폰떼의 조명 테러 탓에 좀처럼 백프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기다리는 급한 연락이 있으며, 뭐가 그렇게 급히 확인해야 하는 문자가 있단 말인가? 그래 없는데 그렇게 습관처럼 때와 장소 못가리고 열어보는 것 아닌가?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그 와중, 살짝 민망해지며 내 자신의 안 좋은 습관 하나가 생각났다. 바로 베이킹 도중 오븐을 계속해서 열어보는 나쁜 습관 말이다. 그래, 오븐에는 중간에 열지 않고 안을 볼 수 있게 작은 등이 하나 달려있긴 하지...그렇지만 작은 오븐 창으로는 오븐에 거의 뺨을 갖다붙혀도 전체가 잘 보이질 않고 답답하기 짝이 없으며, 자동차 유리처럼 어둡게 코팅되어 있어 색이 제대로 났는지 보이지가 않는단 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흑흑흑...(아 이게 아니고.) 마치 받지 않는 남친 전화에 부재중 전화 이미 몇 통 찍어놓고, 그래 난 대인배니 한시간 넘게 하지 말아야지, 한 후 십분도 넘기질 못하고 다시 부재중 전화 한 통 찍는 것처럼. 5분전에는 안 받고 10분전에도 안 받았지만 지금 하면 받을테니까. 5분전에는 빵이 아직 허얬지만 지금 다시 열어보면 마술처럼 갈색으로 변해있을 테니까, 라는 이성으로 절대 설명 불가한 조급증 때문에 계속 열어보는 나쁜 습관 말이다.


자꾸 오븐을 열어보는 것이 좋지 않은 습관인 이유는 열고 닫기를 0.0001초내에 달성하지 않는 이상 열어볼때마다 오븐의 온도가 팍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많게는 섭씨 2-30도씩 온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 이는 촉촉하지 못한 쉬폰이나, 누르끼끼한 빵이나, 반죽 다 잘해놓고 무언가 상당히 맘에 들지 않는 실패감을 맛보기 딱 좋은 지름길인 것이다. 


공연 다음날, 브런치로 먹을 베이글 반죽을 하면서 이번에는 절대 중간에 오븐에 손도 안댈거야, 라고 머릿속에 각서를 썼다. 반죽을 오븐에 넣고 손톱을 깨물면서, 책을 읽으면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강아지랑 놀면서, 게임을 하면서, 동동거리면서 타이머가 울리기만을 기다렸다.(굽는 시간 20분도 안됨) 그러다 땡 치자마자 오븐 앞으로 달려가니 구수한 갈색의 둥그런 녀석들이 꺼내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강수진 언니 감사합니다!


ps. 베이글에 트위스트를 좀 주어봤다. 어떤가?

pps. 반대로 우리 강아지(사실 십년된 개님)는 하루종일 눈을 못 떴다. 뭘 했다고 피곤하니?



누구나 한번쯤은 그렇듯이, 두어달 전 블로그를 한 번 개설해보자, 라는 결심을 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래, 나도 멋드러지게 써서 블로깅으로 먹고 살 수 있을거야, 라는 희망에 가까운 야망이 커져갔다. 시작은 창대했으나...로 대변되는 블로거 케이스들이 대부분인 이 레드오션에서 내 블로그를 성공시킬 만한 아이디어들을 고민했고, 결국 그래 이거야, 라는 몇가지로 좁히기까지 이르렀다. 광고요청이 이어지고 포스팅마다 댓글이 수십개씩 달리는 내 블로그를 혼자 그려보며 행복감에 가득. 마치 예전 애인 생일케익을 계획하다 버터크림으로 멋드러지게 쓴 그의 이름과, 비싼 버터와 초콜렛으로 무장된 2단짜리 층층케익을 보며 사람들이 꺄아 감탄할 생각에 뿌듯해했던 것처럼.(참고로 우리나라 속담으로 '김칫국부터 마신다'라고 한다나?)

마음 먹은 후부터 마음이 바빠졌다. 개설은 어디다 할지 한참 고민하고, 한달치 주제를 미리 다 써보기도 하고, 디자인도 그려보고. 그러는 동안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고 결국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한채 한달이 흘러갔다. 내가 좋아하는 말 중에 '선택권이 반드시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Choices are not necessarily liberating)'라는 말이 있다. 슈퍼에 치약 사러 갔는데 진열선반 한면 가득을 채우고 있는 수십가지의 치약을 보고 고민하다 머리아픈 경험 다들 있으시겠지. 차라리 한가지만 팔면 그것만 그냥 사면 되는데 말이다. 여튼 고민에 고민을 하는 동안 블로그를 우선 시작하게 되면 그만큼 대단한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에 계획한지 한달이 넘었으나 여전히 난 블로그가 없었다. 

그래서 저번 주말에 결심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간만에 실천하기로 하고 온갖 욕심을 버리고 우선 쓰기로 말이다. 이제 고민은 끝났고 난 마음 편히 글만 쓰면 된다....응? 막상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 : 이미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지 않은(그리고 내 마음에 드는) 아이디 생각해내기는 낙타 바늘 통과하기(생뚱)보다 어렵다.

블로그를 개설하기로 결심한지 한시간째, 난 충혈된 눈으로 티스토리, 이글루스, 텍스트큐브 등에서 아직까지 온갖 단어조합을 시도해 보고 있었다. 역시 계획만 너무 세우다 남친생일 바로 전날밤까지 케익 스펀지도 없이 충혈된 눈으로 레시피를 뒤지고 있던 그날밤처럼. 2단과 크림장식의 욕심을 버리면 일사천리가 될 줄 알았건만. 모든 슈퍼 문 닫은 야밤에 집에는 버터도 없고, 박력분도 없었다. 달걀은 한 개. 밤 12시가 넘었으나 나는 여전히 인터넷에서 분노의 클릭질을 하고 있었다. 뭔가 좀 괜찮아 보이는 레시피를 클릭해 보면 '달걀 3개...' 아님 '버터 넉넉히...'의 테러가 이어졌다.

결국 블로그 신(응?)이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anotherfoodie.tistory.com를 선사하시며 나를 구원해 주셨다. 주소나 디자인이나 백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다음날 아침에 나의 1단짜리 버석버석한 초콜렛 케익을 맛있게 먹어준 옛 애인처럼 여러분도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 




Foodie란?

공지사항 l 2010. 4. 14. 21:57
블로그 제목에서 눈치챘겠지만 저자의 필명은 Foodie(푸디)이다. 영어권에서는 허다하게 쓰이는, 어떻게 보면 좀 진부한 표현이나, 네이버/구글/다음/네이트를 통털어 뒤져본 결과 아직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생소하다고 판단되어 나름 트렌드 세팅을 해보자라는(으하하) 무식한 결심으로 채택해봤다.

Foodie를 영한사전에서 찾아보면 '식도락가, 미식가, 음식에 관심이 많은 사람' 정도로 해석을 해 놓았다. 대략적인 뜻을 커버하긴 하지만 좀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약간 더 설명을 붙이겠다. 물론 더 이상 관심없으신 분들은 여기서 그만 읽으셔도 뭐...

Foodie라는 단어는 1981년 Paul Levy(폴 레비)라는 미국/영국 저널리스트에 의해 파생되었는데, 굳이 직역을 해 보자면 '음식쟁이' 정도가 되겠다.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집요함에 가까운(찔리는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통털어 얘기하는 거다. 때문에 온갖 전국, 또는 윙버스의 힘을 빌려 유럽이나 동남아 등의 맛집까지 발품팔아 돌아다니며 음식이 나오면 백만장 사진을 찍어 스크롤 백만번짜리 글을 올리는 블로거들도 foodie들이며, 그 사진들과 글들을 꼬박꼬박 읽으며 댓글을 열심히 다는 유저들도 foodie들이다.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때 해부하고 연구하고 음미하고 와인 한잔 마셔주며 미간에 주름 한 번 지어주는 미식가들도 foodie들이다. 또 저자처럼 요리도구파는 가게에 들어가면 두세시간은 기본이며 회사에서 보너스가 나오면 백이 아닌 반죽믹서기를 사려고 벼르는 사람도 foodie인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foodie-ism, foodism(푸디즘)등의 단어도 만들어졌으나 foodie만큼 보편적으로 쓰이지는 않고 있는 추세이다.

아, 마지막으로 블로그 주소에서 foodie 앞에 'another'가 붙은 이유는(foodie.tistory.com가 이미 있기 때문...만은 아니고 흑흑) 한국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블로거'라는 타이틀을 마구 달아 또 한명의 블로거의 출현이 더 이상 그닥 기대감이나 특별함을 조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인을 '푸디'로 칭하는 또 한명의 출현 별거없다, 라는 것에 대한 비꼼이릴까. 아 어렵다.

여튼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상당수가 foodie일 것으로 예상된다. 어떤 foodie이신가 다들?(댓글 굽신굽신 비굴모드)

블로그 소개

공지사항 l 2010. 4. 14. 21:07

난 요리를 할때 엄청난 집중력, 무잡념, 창의성, 에너지, 만족, 전율, 의욕, 행복, 그리고 '나다움'을 느낀다. (물론 한때 돌빵을 구워내기도 여러번이고 누구한테 보여줄 수 없는 완성품을 아까워 혼자 위로하며 몰래 먹는 적도 있다.) 칼을 잡고 신나게 채를 썰거나, 아름답게(정말 난 아름답다고 느낀다) 발효된 부드러운 반죽을 둥글릴때의 그 감정은 아직까지는 사랑이라고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는 듯 하다.(이게 바로 싱글현실 도피....응?) 

이 블로그는 '요리'라는 세계의 문화들, 셰프들, 도구들, 요리책, 먹을 곳들, 재료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야식 메뉴 및 그 모두에 대한 나의 단상이다. 가볍게 쓰는 글이 대부분이며 훌륭하고 전문적인 정보는 모아서 길게 연재도 할 것이며 무책임하게 사진 한 장 떡 올려놓고 업데이트라 하기도 한다.

좋은 레시피나 정보 있으면 댓글이나 anotherfoodie 골뱅이 gmail 쩜 com으로 꼭 부탁드린다.(요새 스팸이 많아서 흑) 물론 사소한 한마디나 충고는 더더욱 환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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