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파주 헤이리마을에 처음으로 다녀왔다. 크게 깊이있는 곳이 없다고 들은바도 있고, 같이 간 친구의 친구가 어머니와 4년째 함께 운영중인 카페에 들려 쉬는 것이 목적이어서 큰 기대는 하고 가지 않았는데 말이지...결론적으로 너무 즐겁고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왔다.
카페에서 직접 아침을 해 먹기로 해서 일곱시부터 부산을 떨어 카페 블루메(Blume)에 아홉시 도착. 햇살이 가득한 아름다운 공간내부로 들어가니 하늘하늘 수국이 테이블마다 한가득. 말끔히 정리되어 있는 키친의 온갖 도구들과 원두들 및 드립 스테이션을 보고 정신 못차리며 한참을 구경함. 에스프레소 머신에 불이 들어오고 재료들을 꺼내고 팬을 달구기 시작했다. 카페 옆 텃밭에서 따온 토마토도 썰고, 곰돌이 팬케이크도 부치고, 수란도 만들고, 신선한 레모네이드와 오디쥬스도 한잔씩.
처침히 옆구리 터진 곰돌이들. 머리부터 먹나요 다리부터 먹나요!
생크림과 아몬드 슬라이스, 슈거파우더에 시럽까지 챙겨 햇살이 환히 비치는 창가에 자리잡았다. 거기에 홈메이드 딸기쨈과 스콘까지 추가. 마지막으로 빠질 수 없는 아메리카노 한잔. 역시 텃밭에 자라는 블루베리 나무에서 딴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블루베리 추가.
최근 먹은 스콘 중에 제일 맛있엇다. 적당히 촉촉함.
햇살과 수국이 너무나 아름다운 공간.
그 후 헤이리마을에서 한창 열리고 있는 With Art, With Artist 전시를 몇 군데 구경했다. 금요일이라 표 확인하는 사람도, 구경온 사람도 없이 텅 빈 갤러리들. 날씨가 너무나 무더워 좀 힘들긴 했지만 열심히 걸어다니고 카페 컨셉들도 구경하고 미래의 내 공간도 더 계획하고. 듣던대로 헤이리마을의 건물들은 대부분 현대적이고 독특한 디자인이 많았다. 그 중 내 눈을 제일 끌었던 블루메의 공간은 아래 사진에 나온 콘크리트 '화분'이었다.
건물을 건설할 때 아래 큰 나무를 베어내지 않기 위해 가지와 잎이 그대로 자랄 수 있게 돌려가며 디자인을 했다 한다. 글쎄, 막상 나무는 답답하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베어내는 것 보단 자연과 타협한 디자인을 했다는 것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결정이었다.
햇살이 파고드는 공간. 안에 서 있으면 건물 내부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밖에 있는 듯한 오묘한 느낌이 든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한참 구경하니 출출해 우선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분명 아침에 스콘까지 싹쓸이 했을 땐 점심 안 먹어도 되겠다, 싶었지만 말이다. 크흑... 점심메뉴는 블루메의 대표적인 메뉴인 연잎밥과 장아찌. 나올 때부터 찐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연잎을 살포시 펼치면 쫄깃하면서도 구수하고 향기로운이 한가득 담겨있다. 같이 나오는 반찬은 연근, 매실, 무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는 살짝 매콤한 장아찌와 김. 여기서 제일 큰 서프라이즈는 장아찌위에 올려나오는 호두와 잣이 장아찌와 이루는 극상의 맛의 조화. 견과류 두번이나 더 갖다 먹었다.
심심하지만 밥만 먹고 있어도 향기가 온몸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연잎차도 같이 서빙되어 그 향기를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는데,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은 아주 살짝 거부감이 느껴지실지도. 자스민 차 등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강력추천.
밥을 다 먹고선 연하게 내려주신 훌륭한 파푸아뉴기니 드립커피 한잔을 더 마시고 아래 로스터리 카페를 구경했다. 심플한 진열대를 다양한 원두와 기구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너무나 갖고 싶은 동드립퍼와 포트. @_@
한켠에는 커피나무들 묘목들도 몇 그루 자리하고 있었다.
네가지 원두를 블렌딩한다는 Blume Blending. 이 날 여기서만
커피를 세잔씩이나 마셔 자제하느라 아쉽게도 마셔보진 못함.
밥에 커피까지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집에 가려고 일어서는데 사장언니가 비닐봉투를 하나씩 쥐어주며 옆 텃밭에서 야채를 좀 따가란다. 머뭇거리는 우리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밭으로 들어가심. 뒤따라 들어가려는데 얼굴과 다리에 스치는 잎파리들과 거미줄, 벌레들에 나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 이런 모습 정말 반성해야 함.
그래도 오랜만에, 혹은 처음보는 광경들에 연신 신기해 하다보니 점차 편해지기 시작했고 열심히 사진도 찍고 수확(?)도 했다. 슈퍼에서는 가지런히 놓여있는 수많은 야채들이 실제 자라고 있는 모습, 참 재밌는 경험이다. 조만간 농장과 밭 좀 많이 다녀야겠다.
멀리서도 눈에 들어오는 보랓빛 가지.
꽃이 지고 영글어 가고 있는 오이. 새끼손가락만 했다.
이건 좀 더 자라 제법 크기가 있는 녀석들. 구엽지만 가시가 날카로워 보인다.
중간에 가다가 큼지막한 거미를 보고 완전 헉.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거미줄을 저렇게 정교하게 치는 녀석, 참 경이로운 동물이다 그려.
영글어 가고 있는 초록빛 토마토.
텃밭의 상당한 부분을 고추나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놀란건 가지들에 어찌나 벌레가 많은지! 예전부터 풋고추나 오이는 벌레가 많이 꾀어 농약을 사용하지 않기가 참 힘들다고 들었는데, 풍뎅이 비슷하게 생긴 녀석들이 가지에 다닥다닥 수백마리씩 달려있었다. 좀 더 따고 싶었지만 솔직히 좀 겁남.
빨갛디 빨간 고운 색. 근데 저 가지에 보이는 저런 벌레들때문에 소심하게 몇개만 땄다. 어휴.
내가 딴 것, 사장언니가 따준것까지 봉지에 담고 나니 한가득이다. 오이가 가지에서 오래 익은 노각들도 몇개 받아오고 방울토마토도 몇 개 따왔다. 아침마다 잡초를 뽑아주는 수고를 거르지 않고 꾸준히 키워오는 모녀사장님, 정말 대단들하시다.
커피부터 마지막 야채수확까지, 정말 알찬 하루. 버스를 타고 오면서 더위에 지쳐 몸은 참 피곤했지만 집-회사를 오가는 강남 콘크리트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하루를 보낼 수 있단 생각에 마음만은 여유로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얼마나 보고 배우고 경험할 것이 많은지 새삼 느끼고 왔다. 몇년전 친구와 재래시장을 갔었을 때 사과 코너를 들렸는데,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사과들을 보면서 친구가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일반 슈퍼에는 고르고 골라 반듯한 모양과 일정한 크기의 사과들을 진열해 놓으니, 놀랄법도 하지만 말이다.
카페 블루메는 서래마을 3번 게이트로 쭉 들어가면 바로 나온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요기 블로그에서 운영중.
ps. 그나저나 집에 오는 길에 얼굴 벌겋게 익고 야채 한가득씩 들고 지하철 탄 두 아가씨들, 지하철에서 꽤나 시선집중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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