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며칠전부터 읽기 시작한 Eating Animals라는 책. 이 책을 읽기 전에 고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될거라면서 애써 버티고 있다. 그런데 아까 아침에 볼만한 영화를 뒤져보다 미국에서 히트한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스완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갑자기 나탈리 포트만의 필모그래피가 궁금해졌다. 그녀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란다. 아니, 였단다. 근데 Eating Animals를 읽고 유제품 등 일체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Vegan이 되었단다. 순간 덜컹, 했다. 헉, 역시 이 책은 고기 먹는 것에 대한 정당화에 도움을 주지 않는구나. 에이, 그래도 나만의 이유가 있음 되겠지 하고 창을 닫았다.

카페에 가서 책 몇장을 더 읽었다. 어업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물론 참치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참치를 잡을 때 같이 잡혀 죽는 생물의 종류는 책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마침 카페는 참치횟집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건 뭐, 어떻게 봐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초이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예 안 먹던가, 그냥 무시하던가. 마침 저자가 말한다. 왜 이 이슈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초이스만을 떠올리는가. 책을 덮어버리고 남은 커피를 음미는 커녕 원샷한 후 카페를 나섰다. 서비스로 준 쿠키는 무슨 맛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고 커피는 썼다. 

운동을 하러 갔다. 새해의 목표인 하프마라톤을 위해 이번 주부터 꾸준히 조깅을 하기로 시작했다. 하프마라톤은 20여킬로미터. 한 2킬로미터를 뛰었는데 젠장, 너무 힘들다. 몇달동안 운동부족으로 둔하고 찌뿌둥한 내 몸이 답답하다. 무슨 마라톤은 마라톤, 갑자기 짜증이 난다. 그냥 살던대로 살자, 라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그냥 슬쩍 취소하고 싶기도 하다. 

저녁 밥상에는 김치찌개가 올라왔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요새 읽고 있는 육식에 관한 책이 재밌다고 말을 꺼내본다. 그렇지만 아무도 말이 없다. 침묵이 이어진다. 찌개 한 숟갈을 입으로 가져갔다. 김치와 돼지기름의 조합은 역시 환상궁합이다.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구제역 뉴스가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살처분 된 가축은 백만마리가 넘었단다. 백만마리가 도대체 얼만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지 감도 안 온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번 주말부터 시작할 살사 수업에 대한 내용을 읽어본다. 페이스북도 하고, 다음뷰도 보고, 뉴욕타임즈보도 보고, 싸이도 가보고, 그러다 트위터에 가니 구제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기사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니 그 심각성이 갑자기 확 와닿으며 걱정이 된다. 구제역이 뭔지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봤다. 대강만 읽어도 이런 스케일의 상황에서 살처분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한숨이 나온다.

뉴스를 더 찾아보다가 돼지들이 생매장 되는 사진을 봤다. 누구는 미국 소고기와 관련된 음모설을 재기한다. 왠지 그럴싸하다. 공무원 중에 구제역 근무 때문에 과로사한 사람도 있댄다. 일손이 모자라고 예방접종을 한다 해도 사후처리가 중요하단다. 대만은 실제로 구제역 때문에, 사후처리 부족으로 양돈업이 싸그리 망했단다. 어후 답답하고 걱정된다. 갑자기 뭘 해야 할 것만 할 것 같다. 달려가서 도와? 어떻게 마술로 뿅 하면 구제역을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진짜 좋겠다란 간절함까지 느껴졌다.

그러다 김치찌개 생각에 갑자기 화가 났다. 먼나라 얘기도 아니고, 같은 한국이란 작은 나라안에 있으면서 우리집 저녁 밥상과 신음하고 있는 농가가 이렇게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혔다. 이건 진짜 말도 안된다. 농가에서 돼지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도살되고가 문제가 아니라, 저쪽에서는 지옥중의 지옥인데, 우리는 정말 무덤덤하게 찌개를 입에 넣고 있고, 마트에서는 활발하게 해피하게 돼지고기가 팔리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창을 닫고 잠에 들면, 난 또 이런 감정들을 잠시 누르고 잊은채 내일 살사 수업을 들으러 가겠지. 추가 : 내 친구가 물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사주는 게 농가를 도와주는 거 아니니? 그 측면만 보면 그렇겠지만, 내 요지는 '단절'이다. 우리 집이 돼지고기를 저녁밥상에 올린 이유는 농민들이 아니다. 그리고 수입 돼지고기를 50% 싸게 팔면, 구제역 상관없이 여전히 팔릴텐데? 롯데마트의 통큰갈비가 백톤이 팔렸대매.

이쪽 산업에 대해 더 알고 배우고 나의 소신을 세우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건만,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그냥 살던 대로 살까? 내가 채식을 한다면 뭐야? 왜? 야 됐다, 라는 반응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여기서 덮어버리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터인데 말이다. 근데 왜 채식을 하면 나는 이상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는 걸까? 친구한테 이 책을 읽고 있다고 얘기하니 채식할라고? 야 하지마~란다. 왜? 왜? 왜?

잠시 침대에 누웠다. 머리 맡에 붙여져 있는 나의 바이블인 "칡과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 절단된 선들을 잇고 이어주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이자 즐거움이었지. 마라톤도 고기 이슈도, 우선 달려보자. 그나저나 이 이찬웅님이란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나한테 이렇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글을 쓰셨는지, 만나뵙고 인사나 드리고 싶다.

ps. 제발 구제역의 후폭풍이 우려만큼 심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물론 머리아프고 가슴아픈 뉴스를 접하기 싫은 내 이기심이 더 큰 이유이지만.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맛집 찾아가기보다 더 우선순위는 일반 서점만큼이나 잘 구축되어있고 정리되어 있는 미국의 헌책방들에서 요리/음식 관련 서적을 가방에 넣을 수 있을만큼 쓸어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난 새 책을 사는 것이 너무너무 아깝다. 가격 떄문이 아니다. 창고에서, 혹은 헌책방에 고이 모셔져 있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빠닥빠닥한 코팅된 두꺼운 커버에 새하얀 새종이에 인쇄된 책들이 너무 낭비같아서 말이다. 

여튼, 그렇게 벼르고 가서 이번에 구해온 열몇권의 책 중 제일 기대되는 책은 (사실 새 책이었다는 아이러니와 위선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소설가인 Jonathan Safran Foer의 첫 비소설인 Eating Animals라는 책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현대 도축산업의 끔찍한 장면들을 논하며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또 한권의 책 같아보였지만, 대강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책이었다. 상당한 양의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이 책은 도축산업과 연관된 사람들, 문화, 역사에 대해 꽤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같은 카테고리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집어들게 만든 건 저자가 vegan(유제품 포함한 동물성식품을 일체 섭취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이면서 무려 도살장에서 일하는 인부들과도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몇 페이지만 읽었지만, 오늘 새로 발견한 bluexmas님의 블로그에서 푸아그라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구절을 읽고 갑자기 삘 받아서 포스팅하게 되었다. 나도 사실 푸아그라 안 줘도 그만이다. 웬만해선 맛있고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나, 갑자기 한밤에 먹고 싶어지는 그런 존재는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코스요리에 푸아그라가 나오면 신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걸 주고 덜 비싸게 받지, 라는 생각을 하는 일인. 

무엇보다 푸아그라의 목넘김이 힘든 이유는 푸아그라가 만들어지는 과정 때문이다. 거위를 강제로 폭식(force-feeding)하게 만들어(뭐 깔대기를 꽃아 대량의 사료를 위로 바로 투하시키니 "식"이라 하기도 어렵겠지만) 살찌운 간이 바로 푸아그라인데[각주:1],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이걸 먹어야 하나, 라는 맛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걸 알고 난 후에는 먹을때 드는 일말의 죄책감과 찝찝함에 100% 즐길 수가 없다. 

푸아그라의 상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이집트 벽화.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푸아그라 외에도 육식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여러 다른 동물들을 거쳐갔다. 여기저기서 접한 사진들이나 기사들 때문에 반년간 소/돼지/닭고기를 멀리한 적도 있었고, 참치에 대한 마구잡이 어업의 횡포에 대해 읽었을 땐 소비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절대 참치초밥은 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들은 정확한 근거나 가치관은 커녕 단순히 그때그때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들로 인한 것이었고, 카드값이 여유있는 달만 유기농 유제품을 구입하는 위선적인 내 잣대는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육식이 의미하는 것과 나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고찰한 적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만 까탈스런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도 싫었고, 굳이 설명을 하기도 귀찮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맛있는 갈비와 참치뱃살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때문에 이 쪽 산업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면 왠지 죄책감이 더 커질 것만 같아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래 인생은 짧은데 즐겨야지, 라는 모토와 가끔씩만 먹어주고, 먹을 때는 최대한 환경/동물 친화적인 재료를 선택한다는 단순한 합리화 -- 왠만한 사람들이 말없이 수긍하고 인정할만한 잣대--로 지내왔다.

하지만 이 주제는 점점 밀리는 방학일기처럼 마음 한켠에서 계속 불편함을 제공했고, 요리를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부터는 개학 전날밤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재료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많은 지식과 확실한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이유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 그 결심의 첫걸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몇 장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상당히 기대가 된다. 저자는 매우 위트있게 불편하고 민감한 주제를 아주아주 원론적인 질문부터 소화하기 쉽게 다뤄나간다. 언제부터 우리는 육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들이 있었는지, 푸아그라용 거위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마블링을 위해 꼼짝 못하는 소가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비교해서 도대체 어쩔건지, 일반 양계장의 닭과 들판을 뛰놀며 자란 닭은 정말 다른지 등등의 다양한 질문을 심도있게 다룬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과 가치관에 대한 논란을 떠나 음식과 문화/역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뼈대로 잡고 얘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ps. 이 책을 읽고 나서 편한 마음과 확실한 소신으로 계속해서 육식을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욕심이자 이기심이지만 여전히 (더) 불편한 진실로 남을지도 몰라 좀 두렵다 -_-


  1. 엄밀히 얘기하자면 force-feeding으로 사육되는 거위가 아니면 프랑스법에 따라 foie gras라고 부를 수 없으나, 일부 생산자들은 자연적인 사료섭취, 혹은 거위의 간이 자연적으로 제일 커져있을 때를 골라 도살하는 방법등을 통해 "foie gras"를 만들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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