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깊은생각: 식스센스를 일깨우는 소울푸드

joowon 2011. 10. 29. 13:13
얼마전 Culinary Artistry라는 책을 읽다 인상깊은 차트를 발견했다. 단순히 생업인지, 숙련된 기술자인지, 혹은 예술가인지로 요리사들을 세 부류로 나눠 비교하는 차트였다. 각 부류의 목적, 가격, 요리하는 주된 재료 등등으로 비교하고 있었는데, 그 중 제일 와닿는 항목은 자극되는 감각의 가짓수였다. 첫번째와 두번째 부류는 오감에 그치는데 반해, 세번째 부류인 예술가들은 그 이상의 식스센스를 자극한다는 의견. 먹었을 때 그 음식의 비주얼, 촉감, 맛 등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고 느끼게 하는 그런 요리 말이다. 

미국 동부는 며칠전부터 날카로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무들도 불긋게 물들기 시작했고. 안 그래도 요새 자주드는 집생각에 한국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는데, 날씨가 추워지니 순두부 생각이 간절해졌다. 근처 한식당에서 부들부들하고 얼큰한 순두부 한숟갈을 입에 떠넣는 순간, 따뜻한 스프나 커피로는 절대 풀리지 않던 추위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서울에 대한 그리움도 따뜻하게 위로가 되는 느낌이었다. 

미국에서 소울푸드(Soul Food)의 사전적/공식적인 의미는 남부 흑인 커뮤니티의 특정 음식들을 아우르는 요리이다. 그렇지만 속어로 순두부처럼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들을 소울푸드라고 통칭해서 부르기도 한다. Comfort Food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고.

 이전 내가 하고 싶은 요리에 관한 포스팅에서 언급했지만, 싱가포르의 한 식당에서 먹은 디저트가 무척이나 감동적이어서 불러달라 한 셰프는 "I'm glad it touched your soul."라는 표현을 썼다. 그 뒤로 나는 이렇게 제 6의 감각, 소울, 감정등을 일깨우는 요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식당을 나서서도, 몇년이 지나도 가끔 한번씩 떠오르는 그런 맛. 이제 나에게 '소울푸드'라는 용어는 그런 모든 음식을 의미한다.

아직까지 내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는 소울푸드들(순서는 지금 그냥 떠오르는 대로):

- 파리에서 유명하다는 생 카라멜을 사러 한 캔디샵에 들렀다 샘플로 시식한 초콜렛을 씌운 아몬드. 보통 초콜렛 등을 씌우면 아몬드가 약간 눅눅한 느낌이던데 그 아몬드는 완벽히 바삭했고 입에 잔여물 따위는 남지 않았다. 너무나 가벼우면서도 온갖 다양한 맛의 조화와 고소함.....
- 르 알라스카에 견과류 잔뜩 올라간 브리오슈 종류의 빵을 먹다 씹은 아몬드. 한참 여운에 취했었다. 알맞게 토스팅 된 견과류는 생 견과류에 비할 바가 못된다. 아직 이에 비할 아몬드를 먹은 기억이...
- 안효주 주방장님이 쥐어준 솜사탕 같던 아나고(붕장어) 초밥. 으어어어...
- 파리 길거리를 걷다 사먹은 살짝 차가운 바게트와 브리치즈 샌드위치 한 입. 밀가루/소금/물의 간단하지만 성스러운 조합의 결과물. 완벽한 소금간과 바삭하지만 쫄깃한 크러스트와 부드럽고 달기까지 한 속살..............파리 보내주세요 엉엉
- 파올로데마리아에서 먹은 헤이즐넛 케익과 아직까지 정체를 모르는 달달한 와인향의 소스.
- 레스쁘아의 안심 스테이크를 가르는 순간. 보석같다는 표현 이외에 설명할 길이. 물론 거기에 풍겨오는 향기까지. 추가로 레스쁘아의 어니언슾. 아프거나 춥거나 숙취가 심할 때 만병통치약.
- 샌프란시스코에서 잘 가던 중국베이커리. 바베큐 양념의 돼지고기 들어간 찐빵류의 빵을 자주 사먹었는데 한번은 내가 들린 딱 그 순간 막 구워져 나오고 있었다. 빵집을 나오면서 한입 베어무는 순간 달달한 양념과 함께 풍겨오는 은근한 청주의 향기. 거기에 부드럽게 씹히는 돼지고기. 남자친구 것까지 두개 샀는데 집에 오면서 두개 다 먹어버렸다. -_-
- 샌프란시스코 어딘가에서 먹은 일본된장양념의 생선구이. 겉면은 파삭하고 속살은 정말 부들부들.아주 따끈했던 기억도 강렬하다.
- 인도에서 먹었던 도사(dosa). 커리/감자와 바삭하게 구워진 도사의 조합은 안 먹어본 사람은 절대 알수가 없다.
- 박찬일 셰프님의 홍대 라꼼마에서 먹은 식전빵. 손에서의 온도와 느낌, 맛까지 생생하다 아주 그냥. 
- 지금은 없는 이태원 봉에보의 토마토 샤베트. 토마토의 맛이 완전히 전해지면서도 토마토의 채소스러움을 (뭐 과일이라 따질수도 있겠지만)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훌륭한 저녁 먹고 후식으로 과일 두쪽 나왔을 때의 허무함이나 부족함도 전혀. 완전 충족. 
- 중국에서 먹은 새우볶음. 특히 같이 볶아진 오이. 오이는 생으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 예전 대학다닐때 근처 사과 농장 갔다가 아무 생각없이 한입 베어문 작은 사과. 그래도 한국사과가 제일 맛있다는 얘길 들으면 난 속으로 그 때 그 사과를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아 밤 열두신데 배고파서 그만 써야겠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