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구제역 뉴스를 보며 무덤덤히 돼지고기를 먹는 우리 가족

joowon 2011. 1. 8. 04:08
며칠전부터 읽기 시작한 Eating Animals라는 책. 이 책을 읽기 전에 고기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도 그럴 생각이 없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될거라면서 애써 버티고 있다. 그런데 아까 아침에 볼만한 영화를 뒤져보다 미국에서 히트한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스완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갑자기 나탈리 포트만의 필모그래피가 궁금해졌다. 그녀의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란다. 아니, 였단다. 근데 Eating Animals를 읽고 유제품 등 일체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Vegan이 되었단다. 순간 덜컹, 했다. 헉, 역시 이 책은 고기 먹는 것에 대한 정당화에 도움을 주지 않는구나. 에이, 그래도 나만의 이유가 있음 되겠지 하고 창을 닫았다.

카페에 가서 책 몇장을 더 읽었다. 어업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물론 참치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참치를 잡을 때 같이 잡혀 죽는 생물의 종류는 책의 한 페이지를 가득 채웠다. (마침 카페는 참치횟집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건 뭐, 어떻게 봐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지만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초이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예 안 먹던가, 그냥 무시하던가. 마침 저자가 말한다. 왜 이 이슈에 관해서는 사람들은 항상 두 가지 초이스만을 떠올리는가. 책을 덮어버리고 남은 커피를 음미는 커녕 원샷한 후 카페를 나섰다. 서비스로 준 쿠키는 무슨 맛인지 잘 기억이 나질 않고 커피는 썼다. 

운동을 하러 갔다. 새해의 목표인 하프마라톤을 위해 이번 주부터 꾸준히 조깅을 하기로 시작했다. 하프마라톤은 20여킬로미터. 한 2킬로미터를 뛰었는데 젠장, 너무 힘들다. 몇달동안 운동부족으로 둔하고 찌뿌둥한 내 몸이 답답하다. 무슨 마라톤은 마라톤, 갑자기 짜증이 난다. 그냥 살던대로 살자, 라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그냥 슬쩍 취소하고 싶기도 하다. 

저녁 밥상에는 김치찌개가 올라왔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요새 읽고 있는 육식에 관한 책이 재밌다고 말을 꺼내본다. 그렇지만 아무도 말이 없다. 침묵이 이어진다. 찌개 한 숟갈을 입으로 가져갔다. 김치와 돼지기름의 조합은 역시 환상궁합이다. 틀어놓은 티비에서는 구제역 뉴스가 나오고 있다. 현재까지 살처분 된 가축은 백만마리가 넘었단다. 백만마리가 도대체 얼만지,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지 감도 안 온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이번 주말부터 시작할 살사 수업에 대한 내용을 읽어본다. 페이스북도 하고, 다음뷰도 보고, 뉴욕타임즈보도 보고, 싸이도 가보고, 그러다 트위터에 가니 구제역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기사를 제대로 보기 시작하니 그 심각성이 갑자기 확 와닿으며 걱정이 된다. 구제역이 뭔지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봤다. 대강만 읽어도 이런 스케일의 상황에서 살처분이 최우선이 아니라는 걸 알겠다. 한숨이 나온다.

뉴스를 더 찾아보다가 돼지들이 생매장 되는 사진을 봤다. 누구는 미국 소고기와 관련된 음모설을 재기한다. 왠지 그럴싸하다. 공무원 중에 구제역 근무 때문에 과로사한 사람도 있댄다. 일손이 모자라고 예방접종을 한다 해도 사후처리가 중요하단다. 대만은 실제로 구제역 때문에, 사후처리 부족으로 양돈업이 싸그리 망했단다. 어후 답답하고 걱정된다. 갑자기 뭘 해야 할 것만 할 것 같다. 달려가서 도와? 어떻게 마술로 뿅 하면 구제역을 없앨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진짜 좋겠다란 간절함까지 느껴졌다.

그러다 김치찌개 생각에 갑자기 화가 났다. 먼나라 얘기도 아니고, 같은 한국이란 작은 나라안에 있으면서 우리집 저녁 밥상과 신음하고 있는 농가가 이렇게 단절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가 막혔다. 이건 진짜 말도 안된다. 농가에서 돼지들이 어떻게 길러지고 도살되고가 문제가 아니라, 저쪽에서는 지옥중의 지옥인데, 우리는 정말 무덤덤하게 찌개를 입에 넣고 있고, 마트에서는 활발하게 해피하게 돼지고기가 팔리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 창을 닫고 잠에 들면, 난 또 이런 감정들을 잠시 누르고 잊은채 내일 살사 수업을 들으러 가겠지. 추가 : 내 친구가 물었다. 이럴 때일수록 더 사주는 게 농가를 도와주는 거 아니니? 그 측면만 보면 그렇겠지만, 내 요지는 '단절'이다. 우리 집이 돼지고기를 저녁밥상에 올린 이유는 농민들이 아니다. 그리고 수입 돼지고기를 50% 싸게 팔면, 구제역 상관없이 여전히 팔릴텐데? 롯데마트의 통큰갈비가 백톤이 팔렸대매.

이쪽 산업에 대해 더 알고 배우고 나의 소신을 세우기 위해 독서를 시작했건만, 갑자기 힘이 쭉 빠졌다. 그냥 살던 대로 살까? 내가 채식을 한다면 뭐야? 왜? 야 됐다, 라는 반응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여기서 덮어버리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터인데 말이다. 근데 왜 채식을 하면 나는 이상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는 걸까? 친구한테 이 책을 읽고 있다고 얘기하니 채식할라고? 야 하지마~란다. 왜? 왜? 왜?

잠시 침대에 누웠다. 머리 맡에 붙여져 있는 나의 바이블인 "칡과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 절단된 선들을 잇고 이어주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이자 즐거움이었지. 마라톤도 고기 이슈도, 우선 달려보자. 그나저나 이 이찬웅님이란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길래 나한테 이렇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글을 쓰셨는지, 만나뵙고 인사나 드리고 싶다.

ps. 제발 구제역의 후폭풍이 우려만큼 심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물론 머리아프고 가슴아픈 뉴스를 접하기 싫은 내 이기심이 더 큰 이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