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Ode to Chef Park

joowon 2012. 10. 26. 10:32



얼마전 박찬일 셰프님이 또 한권의 책을 내셨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에세이 집. 정말 내가 쓰고 싶었던 느낌의 글인데 역량과 경험 부족으로 흉내도 못내고 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늦봄에 뵈었을 때 구워주신 오징어가 생각이 나 아래글을 써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국립학교였던(소위 말하는 어디어디 부속초등학교) 우리 학교는 다른 공립학교에 비해 일찍 급식을 시작했다. 메뉴도 다양해 매일 다른 반찬과 국이 나오고, 가끔씩 모두가 손꼽아 기다리던 핫도그에 크림스프, 혹은 닭죽같은 별식도 제공되었다.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과 플라스틱 의자로 빼곡한 서늘한 급식실에서 아이들은 어깨를 맞대고 일렬로 앉아 매일 정확히 같은 시간에 서투른 젓가락질로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은 학생들이 쭈욱 줄을 서 식판 검사를 받는 광경은 급식실의 서늘함을 걷어내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끔 지독한 담임선생이 걸린 반은 식판을 머리 위로 엎어야 건물을 탈출할 수 있었다. 소주잔이야 머리에 털어도 알콜 몇 방울 맞고 말지만, 김칫국물은 어쩌라고. 여튼 싫은 반찬이 나오는 날은 여간해서 다 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선생님 눈치를 보며 몰래 식탁 밑으로 시래기나물을 버려버리곤 했다. 치우는 아주머니들은 한숨이 나왔겠지만.

나에게 제일 고역이었던 난관은 시래기나물도 아니고, 오이짠지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리는 음식 하나 없었던 나도 도저히 항복을 외칠 수 밖에 없던 메뉴는 바로 맵고짠반찬3종세트에 얼큰한 국까지 곁들여 나오는 콤보였다. 차라리 반찬 하나라도 새콤한 것이 있었더라면 조금 먹기 쉬웠을까, 고추장에 진득하게 버무려진 오징어채, 뻘건 배추김치, 고추기름이 흥건한 오뎅볶음을 먹다보면 내 혀가 매운 범벅이 되 버리는 느낌이었다. 미美를 공부하셨을 우리 미술 담당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이 식판의 시뻘건 미학을 공감해 드리지 못해 화가 나셨던 걸까. 유독 그런 날 식판 검사가 심하게 느껴진 건 그래서였을까.

마치 차력대회 같았던 그 경험들은,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도 식당 곳곳에서 치룰 수 있다. 고추장에 뒤덮여 재료맛은 하나도 모르겠는 낙지볶음을 물을 벌컥벌컥 마셔가며 가까스로 다 먹고 나면, 철판에 흥건하게 고인 검붉은 양념에 밥을 볶아 한방울도 남김없이 먹게 배려해준다. 매운갈비찜, 불닭, 해물찜, 거기에 어김없이 딸려나오는 매운반찬3종세트와 밥볶아먹기 옵션. 그래도 내 돈 내고 먹는다고 식판 검사는 안하니, 감사해야 할 일인가. 오히려 한국사람이면 매운 걸 잘 먹어야 한다는 요상한 세뇌교육에 이 정도면 견딜만하네, 라며 자긍심을 느꼈었기도? 음식맛은 잘 기억나지 않고 연신 물을 들이키고 땀을 닦아내는 행위의 기억만 아련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홍대의 라꼼마. 포근한 봄 햇살이 가득했던 5월말, 박찬일 셰프님이 구워주신 오징어 맛은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혀끝에 생생하다. 소금 외에는 별다른 양념이 없이 정직하게 누워있던 오징어 한마리. 씹으면 씹을수록 부드럽고 달콤한, 그리고 살짝 씁쓸한 오징어의 바다향기가 콧속까지 가득 차 올랐다. 그런데 무슨 오징어였더라. 하긴 오징어건 낙지건 맨날 맵게 무쳐버리니 내가 어찌 알겠냐며 막연한 원망을 할 뿐이다.

후루룩 써버린 울퉁불퉁한 글이지만 항상 영감과 희망을 주시는 박셰프님께 드린다. 

책은 물론 강력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