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이것저것 만들어 주변에 돌리기 일년여, 이번엔 처음부터 작정하고 주문을 받아보았다. 주로 어른들을 위한 것이고 추석이라 이전 간단한 포스팅에 올린 것처럼 사과, 밤, 호박 등의 가을스러운 재료를 테마로 잡았다. 거기에 초콜렛과 바나나 등으로 좀 더 달콤함을 추가. 저번 이벤트처럼 요고조고 들어간 박스로 할 것인가, 조각케익식으로 할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여덟가지가 한조각씩 골고루 들어간 8종 케이크 세트로 결정.


막상 야심차게 여덟가지로 구상을 했지만, 맘 한켠에는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이 약간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주문과 입금까지 받고 실제로 착수해야한다고 생각하니 그 의구심은 두려움으로 변하고, 새로이 도전하는 레시피도 있는데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거기다가 추석 하루이틀 전에만 배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다들 일찍 휴가들을 내셔서 평일 저녁에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점점 부담감은 커져갔지만, 뭐, 내가 일 벌여놓은 것. 숨 한번크게 쉬고 재료 장보기부터 시작!


케이크류가 여덟가지니 평소보다 재료는 어마어마했다. 달걀 서른개, 버터 큰 걸로 두덩이, 설탕 한푸대, 밀가루 한푸대. 거기 단호박 두덩이. 혼자 베이킹을 할때보다 선물용은 재료 고르는 것도 그만큼 더 신경이 쓰였다. 사과도 더 이쁜 것을 고르게 되고, 원산지도 그만큼 더 신경쓰게 되고. 


포장재료는 온라인으로 사려고 했으나, 추석연휴가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비상걸린 택배사들이 이틀안에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에 아침일찍 방산시장도 다녀왔다. 리스트를 만들어가 한 삼십분이면 쇼핑이 끝날줄 알았으나 웬걸, 막상 오프라인으로 가니 없는 것들도 많고 웬지 장사할 마음이 없어보이는 주인분들이 너무 많아 기분도 좀 상했다. 생각해 놓은 포장컨셉이 있는데 온라인서 찜해놓은 둥그런 박스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 예상외로 방산시장 바닥도 좀 헤메고 다니고......우여곡절 끝에 장보기를 끝내니 땀은 한바가지에 몸은 녹초.


집에와서 첫날은 우선 재료 계량부터 시작했다. 마른재료를 각각 따로 개량해 지퍼백에 스티커로 구분해 담아놓고 버터 등등도 나누고. 당근 갈은 것, 레몬껍질 및 사과 등 전처리가 필요한 재료들도 미리 준비해 놓고. 치즈케이크를 위한 녹차 제누와즈 굽고. 이렇게만 하는데도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회사 다녀와서 하려니 잠도 모자라서 졸린 눈으로 계량하는 바람에 막 흘려서 부엌도 난장판.


다음날은 머랭등을 내지 않아도 되는 조금 더 수월한 것들로 구웠다. 집안은 오븐온도로 점점 더워가고...설겆이 거리는 늘어가고...그래도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찬 부엌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결국 찹쌀케이크까지 다섯판을 굽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팔 겉어부치고 세판을 마저 굽기전, 이미 완성된 아이들을 슬라이스 하는데, 끄악, 바나나 브레드 중앙이 전혀 익지를 않은 것이다. 더 예쁘게 한다고 바나나를 꽃아서 구웠는데, 중간에까지 꼽으니 습기때문에 익지 않은 것. 분명히 꼬치테스트 했을 때는 묻어나오질 않았는데 말이다 엉엉......

문제의 덜 익은 바나나 브레드. 얼핏 보면 커스타드 크림 같다.
이런 상태로 다시 오븐에 넣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븐에서 한 십여분 더 구워봤다. 그러니 익긴 있었는데, 역시 속살은 꾸덕꾸덕해지고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겉표면은 초콜렛처럼 확 진해져 버렸다. 바나나 일곱개에, 온갖 향신료와 유정란 등 재료등이 너무 아까웠고 짜증이 몰려왔다. 

이걸 새로 다시 구워야 하나? 조금 식혀서 먹어보니 먹을만은 했고, 여덟가지나 되니 한조각 별로라도 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듯 했다. 통에 넣어두고 몇시간이 지난 후 먹어보니 좀 더 촉촉해졌을 때는 정말 갈등이 되었으나, 역시 내가 봤을 때 실패작인 이걸 아무렇지 않게 내보낼 수는 없었다. 임기학 셰프님이 셰프는 모든 과정에 떳떳하고 정직해야 한다, 라고 하신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며 결국 한판 새로 구웠다.


바나나 브레드 사건 말고는 그 어떤때보다 생각한만큼의 퀄리티가 나와주어서 매우 행복했다. 좀 더 긴장하고, 정성을 다하니 그만큼 손끝에서 실현이 되더라. 거기에다가 저번 이벤트 할 때 했던 여섯가지 이상의 더 많은 가짓수를 하면서 그만큼 더 멀티태스킹 능력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고. 잘 포장해서 배달했을 때 즐거워 하는 내 첫 고객(?)들을 보며 느낀 그 뿌듯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수 없었다.

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곧 추석이 다가오고 동생도 모처럼 때맞춰 휴가를 나오게 되면서 우리집은 벌써부터 음식준비에 바빠지고 있다. 명절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주인공은 고사리, 돼지고기, 김치 등을 넣어 바삭쫄깃하게 부친 녹두빈대떡. 요새는 백화점에 아예 빈대떡 반죽을 포장해 팔더만, 우리집은 변함없이 매년 생녹두를 사다 직접 갈아 반죽을 만든다. 대야 한 가득 담긴 녹두를 몇시간 내내 불리고, 껍질을 까고, 믹서기로 갈고, 들어가는 재료를 손질하고 섞으면 반죽 완성. 그러면 부엌바닥에 신문지를 쫙 깔고, 식용유 큼직한 병 하나를 갖다놓고 널찍한 팬에다 부치기 시작하는데, 온 집안이 곧 고소한 기름냄새로 진동하기 시작한다. 


나랑 내 동생이 어렸을 땐 옆에 앉아 입천장을 디어가며 팬에서 방금 지져낸 바삭한 빈대떡을 집어먹기 바빴다. 그 고소한 녹두의 맛이란! 거기다가 간간히 씹히는 곰곰하고 아삭한 김치와 부드러운 돼지고기까지. 그렇게 정신없이 몇개를 연달아 먹고 나면 배가 불러왔고, 욕심에 한 입 더 베어물고 남기는 만용까지. 잘 먹기만 해도 부모님이 기뻐하셨던 그 땐 이 맛있는 빈대떡이 얼마나 심각히 손이 가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절대 몰랐다.


한살두살 나이를 먹어가며 우리가 빈대떡에 기여하는 참여도는 조금씩 늘어갔다. 처음에는 집게, 키친타월 등 필요한 걸 나르는 심부름. 그 후에는 한 김 식은 빈대떡들을 한구석으로 정렬시키고 새로 부치는 뜨거운 녀석들을 위해 새로이 키친타월 깔아주기. 반죽 물이 위로 올라오면 잘 저어줘서 다시 농도 맞춰 주기. 그러다 어느 날, 녹두껍질을 까던 어머니가 부르심.

"자, 이 나머지 좀 까봐라. 손을 너무 쓰면 쉬어버리니까 살살 다루고."

까짓거, 하고 앉았는데 윽, 이게 보통일이 아닌 것이다. 녹두를 물에 담가 살살 저어가며 떠오르는 껍질들을 체로 건지고, 또 슬슬 비벼가며 껍질을 벗기고, 또 체로 건지고. 한시간 정도 하다보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그렇게 삼십분이 흐르고, 또 한시간이 지나고. 식탁 위 전등 하나 키고 난 세시간째 벌건 눈을 하고 녹두껍질을 까고 있었다. 사실 껍질이 약간은 있어도 별 지장없고 푸르고 텁텁하지 않을 정도로 골라내면 되는데 한번 발동걸리면 멈출 줄 모르는 이 완벽주의 때문에 결국 100% 껍질 다 벗겨버림. 그리고 그대로 침대에 기절했다.


아침에 녹두를 보신 어머니는 감탄을 하셨고 그 다음부터 녹두껍질을 까는 것은 매년 내 몫이 되었다.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얼마나 힘들게 노릇한 색이 나오는지 알기 때문에 빈대떡의 후덜덜한 귀중함을 느끼며 더 맛있게 먹게 되는 건 사실이다. 몇시간째 껍질을 까다 보면 깐 녹두 한 알만 개수대로 흘려보내도 마치 금싸라기를 흘린 느낌(녹두알들이 정말 금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녹두로 만든 반죽이기에 굽다가 반죽을 흘리거나 명절손님이 식사중 빈대떡 한입을 남기기라도 하면 그 순간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확 뒷골이 땡김. 

커피 한 잔 내리는 원두를 얼마나 세심히 골라내는지, 파스타 소스에 들어가는 토마토 한 알 한 알의 껍질을 일일이 벗겨야 하는 사실 등을 알고 나면 정말 음식을 남길 때 가슴이 찢어진다. 매번 하는 얘기지만, 단말기처럼 완제품만 섭취하는 소비자로써 그 뒤에 숨겨진 긴 작업시간과 정성을 알기란 너무 어렵다. 그렇지만 그걸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면 더 이상 그 음식이 같은 맛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접시에 담긴 음식의 사진 한 장이 아닌,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들이 눈앞에 파노라마로 지나가며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만큼 더 깊어지는 그 음식의 가치와 맛. 

요리를 하는 건 물론 재미도 있고 어쩔 땐 절약도 된다. 물론 더 맛있을 수도 있고 원하는 재료를 좀 더 풍성히 넣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요리를 즐겨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음식에 대한 나의 이해와 가치를 높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ps. 그러나 내 동생은 휴가나와서 부치기가 무섭게 우적우적 먹기만 할 것이 뻔하고, 녹두껍질을 까봐야, 아 이래서 우리 어무이가 빈대떡 먹고 싶다면 한숨부터 쉬시는구나, 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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