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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0 소스 한방울까지 아쉬웠던 레스쁘아 L'Espoir 19
나는 보통 음식점을 가서 사진을 잘 찍지 않는 편이다. 관광하러 갔다가 사진 찍는데에 너무 정신이 팔리면 막상 직접 보고 느끼는데의 집중력이 분산되는 것이 싫은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음식이 갓 테이블에 올라 따끈할 때 맛보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블로그에 굳이 여러장 올리지 않아도 이미 리뷰사이트들과 다른 블로그들에 음식사진들은 충분히 올라와 있는데다가, 또한 주문하고 과연 어떤 비쥬얼이 등장할 것인가 상상해 보는 것도 상당한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레스쁘아에서 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얘기해 드리고 싶은 스토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보통 셰프에게 최고의 칭찬은 깨끗하게 빈 접시라고 하지 않는가. 얼마나 깨끗하게 먹었는지(웨이터에게 약간 민망할 정도로) Before와 After를 비교해 드리고 싶어서 한장씩 박아왔음.

삼성동 아파트 단지 건너편 골목에 자그마하게 위치한 레스쁘아는 윙버스에서 처음 발견했다. 예전 살던 곳이라 반갑기도 했고, 좋은 음식평들에 한 번 가보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 나에게 르 알라스카를 소개해준 그녀와 함께 비오는 스산한 화요일 레스쁘아로 향했다. 


자그마한 공간에 여섯개 정도의 식탁, 가지런히 걸려있는 와인글래스, 요리서적이 놓여있는 은은한 불빛의 레스쁘아는 이국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역시 자그마한 오픈키친에서는 남자 세 분이 열심히 준비를 하고 계셨고, 웨이터는 훤칠한 남자분 한 분. 

메뉴를 한참(정말 한참) 고르고 고르다 결국 단품으로 스프, 샐러드, 메인 두가지를 시키기로 결정. 거기에 와인은 보르도 블랑(Bordeaux Blanc) 반병짜리.


첫 주인공 양파스프.


양파스프가 이럴 수 있구나. 어머어머어쩌니이거어떻게이렇게만들지양파를어떻게볶은거야도대체치즈는뭐지오마이갓어머나를 연발하면서 싹싹 긁어먹었다. 나의 짧은 작문실력으로 대강 표현을 해 보자면 뜨끈달콤구수고소짭짤쫄깃부들 정도 되겠다. 여태까지 먹은 양파스프중에 단연 일등. 물론 주관적이라 하겠지만 하도 이 스프에 대한 극찬 리뷰들을 읽어 기대감 한껏 상승한 상태에서 저 정도의 감동을 느낀다는 건 대단한 맛이라는 것이 아닐까.

양파스프는 먹고나서 너무 정신줄 놓고 있다가 웨이터가 빈 그릇 치우기 전 사진 못 찍음.


두번째 주인공 비트 샐러드.


잘 익힌 비트는 정말 맛있다. 달짝하면서 상큼하고, 내가 좋아하는 뿌리야채의 그 부드러운 식감까지. 이 샐러드는 절대 드레싱이나 치즈로 범벅이 되어 있지 않다. 한줌의 그린 밑에 사과와 호두, 비트가 섞여있고 블루치즈 두조각이 얌전히 곁들여 나온다. 상큼한 드레싱과 모든 재료들이 산뜻달콤새콤아삭한 조화를 자랑하며 약간 꼬리꼬리한 블루치즈가 깊이를 더해준다. 그리고 샐러드 먹다보면 잎파리들이 너무 많이 남거나 부족한데, 요것은 딱 좋았음.


초토화.


옆 테이블에 여섯명의 테이블이 있어 메인이 나오는데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킨 메뉴들의 비주얼과 맛에 점점 기대가 되며 들썩들썩하고 있을 때...


오리 콩피 등장.


우선 육수와 아래 깔려있는 보리밥(?)을 조금 떠서 먹었는데 약간 맹숭한 느낌. 몰려오려는 실망감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 거부하고 있었는데 웨이터님, "콩피는 살을 발라 육수와 함께 숟가락으로 드시면 더 맛있습니다." 아하하하 그래 나 콩피 먹어본 적 없고. 베시시 웃으며 감사의 미소를 날리고 얼른 살을 발랐다. 

오리를 뒈췌 어떻게 구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드럽고 쫄깃한 살점과 깊은 맛의 육수, 탱글탱글한 보리밥이 어우러진 한 숟갈. 정말 구수하면서 기름지면서 담백했다.(나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 조합인지 모름) 거기다가 너무 느끼하지 않게 잡아주는 은~은한 상큼한 뭔가가 끝맛에 느껴졌다. 먹으면서 뭘까뭐지도대체뭐냐고아진짜뭐지를 되뇌이며 먹다가 순간 오렌지라는 것을 깨달으니 눈에 들어오는 곱디고운 오렌지 제스트.(근데 알고 봤더니 메뉴에 오렌지라고 써 있어서 엄청 허무했음)

이 메뉴가 특히 좋았던 점은 시간이 지날수록 식어서 맛이 덜해지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더 깊어진다는 것.

역시 초토화.



그리고 마지막 주인공인 랍스터 리조또.


얼마나 훌륭한 비주얼인가. 

리조또의 노란색 주인공은 사프란(Saffron)인데, 꽃에서 나는 향신료다. 꽃 한송이당 두세가닥밖에 없는 수술을 체취한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비싸다. 그렇지만 향기로우면서 감칠맛나는 특이한 향신료다.

리조또는 밥알이 퍼펙트한 알덴테(내 맘대로 갖다 붙이기)였다. 시작은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끝에 살짝 씹히는 맛. 랍스터는 겉에는 탱글, 속은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다. 정말 남산타워의 엔그릴에서 먹었던 퍽퍽하고 드라이한 8만원짜리 랍스터랑 너무 비교되는...


역시 깨끗하게 마무리.


접시와 랍스터 껍질에 묻은 소스까지 아까움.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정말 반 정신이 풀려있었다. 그렇지만 잠깐 정신을 차리고 디저트 주문.


크렘블레(Crème brûlée) 등장.


크렘블레는 바닐라빈을 충분히 써서 풍부한 바닐라맛과 부드러운 커스터드에, 적당한 두께의 카라멜. 너무 클래식한 맛이어서 그런지 쇼킹한 감동은 없었으나 은근하고 부드러운 마침표. 


이마저 싹싹.



참고로 식전빵은 그냥 무난했다. 톰볼라의 포카치아가 더 감동. 아마 빵을 직접 굽는 게 아니라 공수해오는 듯.(제가 빵은 열심히 만들어 납품해드릴 용의가 있는데 굽신...) 그렇지만 같이 나오는 트러플 오일과 올리브 스프레드는 아주 깔끔하고 좋았다.

청담역 바로 근처인 강남구 삼성동 65번지에 위치한 이 곳은 뉴욕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다니엘에서 경험을 쌓은 임기학 셰프가 오픈한 곳이라 한다. 자리가 협소하니 예약권장.(02-517-6034) 일요일 휴무. 가격대는 스프/에피타이저가 8천원 - 2만2천원. 메인은 2만5천원선에서 5만원선까지. 디저트류는 8천원대. 코스는 5만8천원 - 9만8천원선. 별도세금 10%. 아, 와인이 반병짜리가 많아 좋다.

예전 맛집 리뷰에 관한 단상에 올렸듯이, 정말 맛있는 집은 서비스나 칼로리 등에 신경쓸 겨를이 없이 음식에 집중하게 된다. 레스쁘아는 그런 즐거움과 감동을 안겨준 손에 꼽히는 집이었고, 조만간 다른 메뉴들을 먹으러 갈 계획이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캐주얼한 복장에 슬슬 산책겸 걸어가 훌륭한 요리를 맛볼수 있는 소중한 곳. 주방의 바빠지는 열기를 직접 느낄 수 있고 밥먹고 셰프의 얼굴을 보며 잘 먹었다고 인사할 수 있는 곳.

아, 나 셰프님 안아드리고 싶었는데 수줍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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