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실전도 배울 것이 그득하지만, 마음과 머리로 배워야 할 것도 참으로나 많다. 읽자 느끼자 배우자.

아래 글은 (제가) 부끄럽게도 저와 같은 필명의 푸디(foodi2)를 사용하시는 황교익님의 블로그에서 퍼왔습니다. 꼭 한번씩 읽어보세요 - 최소한 빨간색으로 표시한 부분이라도. 황교익님의 해당 블로그 포스트 링크는 http://foodi2.blog.me/30128375451입니다.

고기와 관련한 몇 가지 상념 (김영수)

 

특이한 직업, 축산물 등급판정사

 

축산물 등급판정사는 도축한 소, 돼지 도체를 육량, 육질에 따라 등급을 날인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축산법에 근거해 생긴 지 10년도 안되니 비교적 새 직종이고, 실제 근무 인원수가 200여명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지방의 외진 도축장에 파견 근무를 하니 희귀한 직업이라는 말이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겉모양에 치우쳐 생각할수록 세상은 서로 고립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국내에서 2000년도에 도축한 소의 99.5%, 돼지 89%가 등급판정사의 손을 거쳐 식탁에 오른 사실을 돌이켜 볼 때, 부지불식간에 세상은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세상의 이치가 풀 한 포기의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에 동조하는 나는, 금을 찾아 엘도라도를 향하지 않고 연금술을 익혀 생활주변을 금덩이로 만들려는 야심가다. 도축장에 들어오는 가축들을 맞이하다 보면 소위 혐오시설인 도축장에서 생산된 고기가 귀하고 귀한 입으로 들어가는 모순도 목격하기도 하고, 떨어지는 소, 돼지값을 푸념하는 생산농가를 통해 허리띠 졸라매는 서민들의 신음을 들을 수도 있다. 요즘은 광우병이다, 구제역이다 지구촌과 발맞추고 있다. 부분과 전체의 오묘한 일치에 맛들인 나로서는 축산물등급판정사라는 직업이 남들처럼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고기는 물의 과학

 

일본에서 물을 연구하는 한 과학자의 물 결정연구 발표가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떠다놓은 물을 사랑한다고 반복해서 애정표현을 하면 하트모양의 결정으로 배열되고, 증오한다고 욕하면 결정이 흩어져 버린다고 하니, 푸른 물의 별, 지구의 생명을 잉태한 장본인답다. 사람이 90%정도의 수분으로 태어났다가 차츰 줄어 60%대로 최후를 맞는 걸 생각하니 인생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흔하다는 이유만으로 공기의 중요성을 모르듯 물의 막강한 영향력을 잊고 살고 있다. 식품 속의 수분 변화와 상태가 식품의 품질에 결정적이란 사실이 가끔 나의 망각을 일깨우고 있다. 고기의 유통, 보관, 조리의 기본 원리가 고기 속의 수분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이다. 수분의 조화에 따라 냉장육, 냉동육, 숙성육, 고급육, 저급육 등으로 편이 갈린다.

 

대부분의 물질은 얼어서 고체가 되면 부피가 줄고 비중이 높아지는데 물은 신비하게도 부피가 커지면서 가벼워진다. 지구상이 온통 얼음으로 뒤덮어도 물에 가라앉지 않고 떠서 물아래 생물에게 보온 담요 역할을 해서 생물이 얼어죽는 사태를 묵묵히 막고 있는 역할도 하지만 고기 속의 근육세포 내에서도 품질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언 고기(냉동육)에 있어서는 보존 기간을 늘리는 대신 조직을 파괴하여 품질을 저하시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얼 때는 표시가 안 나는데, 일단 조리를 위해 녹이는 순간 깨진 병에서 새는 음료수처럼 수분(육즙)이 흘러나와 각종 영양분이 손실되고 씹는 맛이 푸석한 저급 고기가 된다. 고기를 냉동시킬 때도 급속히 온도를 하강시켜야 얼음 알갱이의 크기를 최소화하여 근육조직이 덜 손상돼서 녹일 때 고기조직의 손상도 최소화할 수 있다. 녹일 때는 정반대로 최대한 얼음이 천천히 풀리도록 인내심을 가져야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얼음이 고기 조직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미생물도 번식하지 못하는 0℃근처의 찬물에서, 단백질 자체가 자기분해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 고기의 숙성이다. 운반이나 도축시에 스트레스를 받은 가축도 근육 속의 수분변화로 육질이 결정된다. 스트레스 받은 고기는 도축 후에 수분이 흘러나와 희멀건 색으로 물렁해지거나(돼지의 PSE육) 흑갈색으로 마르는(소의 DFD육) 저급육이 된다. 신선도와 고기의 씹는 맛을 좌우하는 것도 다름아닌 고기 속의 수분 함량(보수력)이다. 어느 한우 고급육 생산 농가의 사육자가 높은 등급 생산 출현율 비결을 귀뜸한 적이 있다. 심한 일교차와 먹이는 물이란다.

 

한우가 국제 경쟁력이 있을까

 

지금은 은퇴한 저명한 금속공학 박사님께서 우리 나라의 세계최초 금속활자의 가치를 모르는 국내의 척박한 문화수준을 한탄한 적이 있다. 금속의 물리적 특성상 금속활자 본이 균열이나 뒤틀림, 부식 없이 제조되고 인쇄의 압력을 이겨내는 기술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과학의 총결산이라고 한다. 또한 문화적 욕구(문화의 대량생산)에 의해 자생되었으니 그 정신적 깊이는 과학 기술력에 비할 수 없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도자기와 함께 활자술을 약탈해 갔던 일본은 비약적인 정신문화의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우리 나라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창조국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물증이 부족하여 사회적 소산이 아니라 우연적 시도이고 실패한 인쇄술이라 판결돼 세계에서 공인받지 못한 상태다.

 

그에 반해, 독일의 구텐베르그 금속활자는 마을 전체를 유적지로 만들어 자국 문화와 근대 중화학 공업의 자부심으로 승화되어 강국독일이 되었다는데 그 박사님은 울분을 느끼고 군사 정부의 유력 인사들과 정부관계자에게 문화재 발굴을 건의했는데, 한마디로 묵살당했다고 한다. 마침 아는 일본인이 임진왜란 때 약탈해간 조선의 여러 금속활자 유물과 자료의 정보를 약속했었는데 이런 한국 정부의 반응을 전하자 그 일본인은 한국의 문화인식 수준에 혀를 끌끌 차며 없었던 일로 되돌렸다 한다. 한 푸대의 비료와 한 푼의 엔화가 아쉬운데 지난날의 쇳덩어리들이 대수냐는 위정자들의 생각을 시대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안타까운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과거의 위정자들의 흘러간 얘기가 아니다. 가치관이 온통 돈이나 물질로 집중되어 문화를 통한 행복을 즐기는 것에 낯설어하는 세태는 현재의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3차 산업 즉, 서비스업이라고 영역을 따로 분류하던 시대는 옛일이 되어서 특정 영역이 아니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술, 영화, 서비스, 소프트웨어 등 인간의 모든 정신 활동을 문화라 통칭하고 있다. 세상은 무형적인 가치에 점점 더 열광하고 있다. 이미 문화의 세기가 도래했다는 호언이 더 이상 과장은 아니다. 장사가 물건을 파는 게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사는 거라 했다. 사람이 고기를 먹을 때는 자동차가 기름을 마시듯 위장으로 퍼붓는 것이 아니다. 조리기술과 전통이 있고 마주 앉아 먹는 분위기가 있으며 그것을 즐기는 인간의 정신이 동반되는 법이다. 에펠탑에서 마시는 포도주나 남산에서 마시는 포도주나 같은 상표 같은 원액임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그 큰 차이에서 문화의 힘을 볼 수 있다.

 

그러면 한우의 상품가치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소고기의 맛을 좌우하는 올레인산(단일 불포화지방산의 일종)의 함량이 외국산 소보다 월등한 한우는 체구가 작아 고기가 부드럽다(체중과 초원에서 방목하는 운동량과 고기의 근섬유의 두께는 비례함). 온도차가 큰 지역의 사과가 맛있듯이 뚜렷한 사계절은 가축의 생체에도 큰 영향을 미쳐, 영양이 부족한 혹독한 겨울을 견디기 위해 뼈와 고기에 영양저장능력을 극대화시킨다. 뼈에서 뽀얀 국물이 나고, 등심의 근내지방도를 측정하는 등급판정에서 높은 등급을 얻을 수 있는 사육조건이 된다. 특히 일하는 소 출신인 한우의 뼈는 수입상들이 대체할 수 없는 귀중한 품목으로 양질의 무기질 공급원으로써 우리 나라 탕국 문화의 근간을 이룰 정도로 명성이 높다. 내장 요리는 신선도가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저가의 수입 냉동제품은 설움을 피할 수 없다.

 

경제논리에서는 원가가 낮은 쪽으로 부가 흘렀지만, 앞으로의 지구촌은 문화(심미적, 예술적)가치가 척도가 되어 (심미안)깊은 문화 쪽으로 기울어질 건 뻔하다. 생산 원가가 유일한 경쟁력이라는 생각은 옷의 가격이 옷의 크기나 무게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는 고집과 같다. 고기 가격이 저울의 눈금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생각은 서양 장사꾼들에게 세뇌당한 후유증이 아닌가 한다. 패스트푸드와 저가의 대량생산이 시대의 주류이지만 유일한 방법이 아니며 오히려 고급요리에 격이 맞는 고급육으로서 한우가 차별화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한우의 국제 경쟁력은 한우생산 농가의 생산원가 경쟁력보다 외국인이 동경할 만한 우리 음식문화의 수준에 달려 있다.

 

문제와 해답은 오묘하게도 항상 내부에 서로 등을 맞대고 있다. 한식이라고 있지만 적어도 식육요리에 관한 한 초근목피 시절의 궁중요리, 부패방지를 위한 탕이나 장조림 등의 방부요리, 저급인 육질을 보완하기 위한 불고기 등의 양념요리 위주다. 최근 인삼 등을 곁들인 보양요리도 본 적이 있지만 고기의 특성을 최대로 살리는 냉장, 숙성과 고급 부분육 판매라는 요즘 유통관행에도 훨씬 못 미친다. 나는 한우를 지키자는 구호가 못마땅한데, 한국인만의 음식과 한국인의 문화로만 제한하려는 국수주의적 발상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

 

맛은 세계인의 언어이다. 세계인의 입맛을 겨냥한 한우 특유의 요리와 문화를 개발해서 ‘원산지 한국’이란 상표가 따라다니게끔 하는 것이 진정한 한식이 아닐까 한다. 일본 화우(和牛)의 고급육 특성을 살려 발빠르게 소고기 샤브샤브란 음식을 만든 일본을 감정적으로만 지지고 볶을 일이 아니다. 온 국토를 문화유적지로 만들려는 유럽선진국은 과분한 언감생심일지라도, 내 기억으로 제작 원가 20달러도 안 되는 트로피로 아카데미상을 만들어 몇 곱절 비싸게 영화를 팔아먹는 미국의 상술이 부럽기까지 하다. 조금 더 급진적인 요리의 전사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선과 부패, 그 사이 (숙성육 Ⅰ)

 

축산물 등급판정사 수습직원으로 도축장에 견학 갔다가 소가 도축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큰 눈을 희번득거리다, 드디어 이마에 날카로운 총소리와 함께 육중한 덩치가 둔탁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소는 죽었다. 그러나 배를 가르자 제각기 꿈틀대고 박동하고 있는 오장육부와 근육을 보고 있으니 무엇이 죽었다는 것인지 혼란스럽다. 모든 자연물에 생명력이 있다는 범신(汎神)론이나 물활(物活)론이 더 이상 어색하지 않았다. 뼈에서 분리된 고기 덩어리는 근육의 기능을 잃었으므로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근육세포는 사람의 고정관념을 아랑곳 않고 외부의 침입 세포와 팽팽히 겨루고 있는 상태다. 균형이 기울어 침입자들이 번성하기 시작해야 비로소 근육세포의 죽음 즉, 부패가 시작되고 만다. 자연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건 단지 상대적이다. 단지 형태만 달리해 순환하는 것뿐인데 인간은 이런 저런 편애로 생사를 가르고 있는지 모른다. 생과 사(부패) 그 사이에 숙성의 존재가 그 증거다.

 

생체외부의 유해 세균 오염과 번식(부패)을 차단하여 유산균 등의 유익한 미생물을 성장시키거나, 아예 모든 미생물 번식을 저지하여 자체 붕괴된 단백질을 만들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기술이 육류의 숙성이다(전문용어로 ‘단백질의 자기소화 과정’이라 한다). 김장김치를 비롯한 장류, 젓갈, 과실주, 짚으로 썩힌 홍어를 비롯해 둘러보면 숙성식품은 의외로 널리 애용되고 있다. 소나 돼지고기, 우유 등 가축 육류의 숙성을 제외하면 우리 나라는 숙성식품의 종주국으로서 손색이 없다. 주식이 육류인 서양인들의 지혜가 건너온 우유숙성식품인 치즈가 의심 없이 할인점에 쌓여있듯, 냉장시설이 발달된 요즘, 소, 돼지고기의 숙성육이 한국에서 대중화는 시간문제다.

 

한우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문전박대 당하던 이유(숙성육 Ⅱ)

 

고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부드러운 소고기 스테이크 재료로 하나같이 수입육 등심과 안심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입 소고기 중에 고급 부위인 등심과 안심은 외국(원산지)에서 0℃ 전후로 냉장 진공 포장되어 비행기로 공수되는 동안 자동 숙성돼서 국내에 반입되거나, 국내에 수입된 냉동 고급부위를 녹여 가공해서 숙성 처리하여 조리된다. 한우가 수입육보다 육질이 고급이지만 고급요리인 스테이크에 부적합하다는 예전에 호텔 측의 이유는, 한우의 육질 규격이 고르지 못하고 유통과정의 위생이 불량하고 냉장 기술이 부족해 숙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육류의 숙성은 보이지 않는 미생물과의 싸움이다. 유통과정에서 일정 수준이상 미생물이 오염된 고기는 미생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식해서 숙성되지 않고(정확히 말해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숙성) 부패되어 버린다. 도축에서 발골, 포장, 판매 등 모든 유통단계에서 미생물의 오염(전문용어로 미생물의 초기 오염도라 함)을 막는 위생관리가 핵심이다. 미생물의 생육을 막으면서 고기를 얼리지 않기 위해 보통 0℃ 전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저온숙성 냉장기술과 오염을 막고 지방의 산패를 방지하기 위해 진공포장이 필요하다. 이중 하나라도 소홀히 되면 마치 과실주가 익지 못하고 식초가 되거나 썩는 것처럼 된다. 이처럼 식품가공 기술이 망라되고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숙성육을 고집하는 이유는 미생물의 도움 없이 카뎁신이라는 자체 효소의 작용으로 단백질이 자기 소화되어 육질이 부드러우며, 새로운 풍미를 내고, 소화가 잘되는 고부가가치 고급식품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축산물 등급판정제도가 정착되어 등급별, 부위별 구매가 성행하고 있다. ‘위해요소중점관리제도(HACCP)’가 국책 사업으로 시행되면서 식품위생이 선진국 수준에 달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얼리지 않는 고기(냉장육)가 선호되면서 냉장기술도 급격히 발전됐다. 실제 숙성육을 이용하는 앞서가는 업소들도 늘고 있다. 수입육보다 한 수위인 한우 고급육으로 고급 숙성 요리가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숙성육=수입육’ 고정관념도 깨질 만한데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기존의 이유를 고집하고 있다. 고급음식점에서 조리재료원가의 비중이 미미한 것을 고려할 때, 고급재료(한우)로 만든 고급음식이 고가로 고급식당에 오르지 못한 것은 아무리 뒤집어 생각해보아도 사람들 탓이 아닌가 한다. 최고급 스테이크를 먹으러 호텔 레스토랑에 간 고객이 한우보다 하등 재료로 조리한 스테이크의 연유를 다그치지 않고, 신기(神技)를 가진 최고의 조리사들이 최고급 재료로 개발한 최고급 스테이크를 권하지 않는 것이, 나는 못내 섭섭하다.

 

고기색의 변신도 무죄

 

쌍둥이도 세대 차가 난다는 요즘, 변해서 튀지 못하면 식물인간 취급을 받는다. 재미나게도 고기의 색깔도 시대를 탄다는 것이다. 냉동유통 시대에는 고기가 밝은 붉은 색일수록 신선하고 검은 색으로 가까이 갈수록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것이 주부 상식이었다. 예전에 정육점에서는 조명을 붉게 해서 붉은 색으로 위장하거나, 심지어 소에 물을 먹여 고기도 밝은 붉은 색을 띠게 하고 고기 무게도 늘리려 한 적도 있다.

 

그러나 요즘같이 랩포장이나 진공포장이 등장한 냉장유통시대에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보통 신선한 쇠고기는 선명한 붉은 색(선홍색)을 띠고 돼지고기는 이보다 연한 붉은 색(담홍색)을 띤다. 그러나 공기(산소)중의 노출정도에 따라 고기는 분홍색에서 검붉은 색까지 변화무쌍하다. 다소 전문적으로 설명하자면, 고기의 붉은 색은 순전히 피 속의 미오글로빈이라는 철을 함유한 성분 때문인데 공기중의 산소와 결합해서 철이 녹스는 것처럼 붉은 색을 띠는 것이다. 접촉하는 산소의 양이 많아질수록 고기는 밝은 붉은 색을 띠고 랩 등으로 산소를 차단하면 검붉은 색이다가 다시 포장을 벗겨서 산소를 접하면 본래의 붉은 색으로 돌아간다.

 

식육문화가 발달하면서 앞으로의 유통체계는 동네 정육점을 벗어나, 등급과 중량별로 개별 진공 포장된 제품을 파는 슈퍼마켓이나 할인점으로 옮겨갈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거기에다 고급육으로 겉이 마르고 끈적하며 거무티티한 색의 숙성육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검은 육색의 고기는 표준육색이 될지도 모른다. 단, 예나 지금이나 돼지고기나 소고기가 조금이라도 녹색을 띤다면 부패한 증거로 미련 없이 내다 버려야 한다.
 

사람에 있어서 변화란 단지 시대를 따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교훈을 던져준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 주부수기가 떠오른다.

 

그 주부는 큰 탄광회사의 자재과에 근무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쇼핑을 즐기며 왕비 못지 않게 수년을 살아왔는데, 어느 날 남편 회사 자재과에 전화를 하게 되었단다. 몇 년을 근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회사에 찾아갔는데, 이빨과 눈만 하얗게 드러난 검은 얼굴의 광부들이 굴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화이트칼라인 남편에 으쓱하며 스쳐 지나가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자세히 보니 다름 아닌 자기 남편이었단다. 남편 모르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두 다리가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랬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더 대단한 것은, 처가와 자신을 속인 남편을 다그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도 그 주부는 남편이 하루하루 목숨걸고 번 돈을 흥청망청 쓰던 자신이 너무나 밉고 화가 났다고 했다. 남편의 자존심이 상할까봐 모르는 척하고 이를 악물고 생활 전선에서 고군분투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게까지 마련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수년 전 탄광회사를 퇴직한 남편은 자기 마누라가 자신이 광부였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주부가 남편의 검은 얼굴을 보는 순간, 아마도 모든 생각과 가치관 끝의 아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빨려 가는 느낌이 아니었을까. 아, 이쯤 돼야 비로소 변화를 언급할 수 있지 않겠는가. 변화 역시 내면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든다. 앞뒤로 누울 자리를 보고, 손익 분기점을 점검하고, 남들의 반응과 환호를 상상하고, 후대의 자손까지 염려하는 속 깊은 고려와 발전하는 자신을 대견스러워 하며 변화를 음미하던 습관이, 그 주부 이야기 앞에서 아련한 신기루 같다.

 

그놈의 구제역, 광우병

 

한산한 암자에 참선을 하러 갔는데도 내 직업을 알아보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며 대중매체에서 떠벌려 놓은 평결을 종결지으라고 안달이다. 정부가 발표한 것 이상 모르고, 죽을 사람은 어떻게든 죽지 않겠느냐고 준비한 너스레를 떤다. 시원치 않은 내 답변 뒤에는 채식하는 소를 고기 먹여 키워서 자연을 거스른 천벌이라고 이구 동성으로 혀를 찬다. 사실 나는 이때부터 기름을 부어 국가의 문제에서 인류의 문제로 화제를 번지게 한다. 식품의 유전자 조작을 시작하여, 식품 첨가물, 잔류농약 등 “천벌”들을 부추긴다. 자국의 이익을 내세워 광우병의 실체를 쉬쉬하다가 한방 먹은 유럽 언론들의 반성을, 한국의 언론들은 긴급 수입(?)하여 국내 발생 여부의 확인도 없이 동물사료 수입과 급여를 근거로 자랑스럽게 특종을 삼았다. 생산자 단체로부터 손해배상을 위협받자 급히 국가의 이익으로 논조를 바꾸고 입다물고 있어 카멜레온 성격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줏대도 지조도 없고 시청률과 구독률 상승을 위해 지역감정에 무임승차하고 충격보도를 일삼으며 정치권력의 편입과정으로 변질된 제도 언론이라고 통째로 싸잡기에는 미안하기도 하고 무리가 따르지만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강박관념이다.

 

천연 생균을 죽여서 만들지 않고 유전자 조작으로 저가 대량 생산된 요즘의 백신들이 아이들의 천식과 알레르기, 각종 난치병, 불치병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발표를 신문 구석에서 찾아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사람들이 조작하는 마음이 문제이지 사실 유전자가 무슨 죄가 있는가. 떨어지는 기존의 대량생산의 이익률을 만회하기 위한 일명 “바이오 산업”의 대량 생산의 부작용은 굴뚝산업의 환경공해와 같은 저항도 거치지 않고 실험실에서 인체로 직접 침투할 거란 수많은 학자들의 경고가 무시되고 있다. 벤처다 뭐다 과학자들마저 돈벌이로 내몰리는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대. 일반대중들은 생체 실험의 마루타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정녕 비관주의자인가.

 
이번에 미국에 갔을 때 맛집 찾아가기보다 더 우선순위는 일반 서점만큼이나 잘 구축되어있고 정리되어 있는 미국의 헌책방들에서 요리/음식 관련 서적을 가방에 넣을 수 있을만큼 쓸어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난 새 책을 사는 것이 너무너무 아깝다. 가격 떄문이 아니다. 창고에서, 혹은 헌책방에 고이 모셔져 있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빠닥빠닥한 코팅된 두꺼운 커버에 새하얀 새종이에 인쇄된 책들이 너무 낭비같아서 말이다. 

여튼, 그렇게 벼르고 가서 이번에 구해온 열몇권의 책 중 제일 기대되는 책은 (사실 새 책이었다는 아이러니와 위선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소설가인 Jonathan Safran Foer의 첫 비소설인 Eating Animals라는 책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현대 도축산업의 끔찍한 장면들을 논하며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또 한권의 책 같아보였지만, 대강 리뷰들을 보아하니 그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책이었다. 상당한 양의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이 책은 도축산업과 연관된 사람들, 문화, 역사에 대해 꽤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듯 했다. 결국 같은 카테고리의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집어들게 만든 건 저자가 vegan(유제품 포함한 동물성식품을 일체 섭취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이면서 무려 도살장에서 일하는 인부들과도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다. 

아직 몇 페이지만 읽었지만, 오늘 새로 발견한 bluexmas님의 블로그에서 푸아그라 안 먹어도 그만이라는 구절을 읽고 갑자기 삘 받아서 포스팅하게 되었다. 나도 사실 푸아그라 안 줘도 그만이다. 웬만해선 맛있고 즐기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나, 갑자기 한밤에 먹고 싶어지는 그런 존재는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코스요리에 푸아그라가 나오면 신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걸 주고 덜 비싸게 받지, 라는 생각을 하는 일인. 

무엇보다 푸아그라의 목넘김이 힘든 이유는 푸아그라가 만들어지는 과정 때문이다. 거위를 강제로 폭식(force-feeding)하게 만들어(뭐 깔대기를 꽃아 대량의 사료를 위로 바로 투하시키니 "식"이라 하기도 어렵겠지만) 살찌운 간이 바로 푸아그라인데[각주:1],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이걸 먹어야 하나, 라는 맛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걸 알고 난 후에는 먹을때 드는 일말의 죄책감과 찝찝함에 100% 즐길 수가 없다. 

푸아그라의 상당한 역사를 보여주는 이집트 벽화.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푸아그라 외에도 육식에 대한 나의 고민은 여러 다른 동물들을 거쳐갔다. 여기저기서 접한 사진들이나 기사들 때문에 반년간 소/돼지/닭고기를 멀리한 적도 있었고, 참치에 대한 마구잡이 어업의 횡포에 대해 읽었을 땐 소비자로써 할 수 있는 일은 소비를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절대 참치초밥은 먹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결정들은 정확한 근거나 가치관은 커녕 단순히 그때그때 느끼는 순간적인 감정들로 인한 것이었고, 카드값이 여유있는 달만 유기농 유제품을 구입하는 위선적인 내 잣대는 그리 오래가질 못했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육식이 의미하는 것과 나의 선택이 미치는 영향들에 대해 제대로 공부하고 고찰한 적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지만 까탈스런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도 싫었고, 굳이 설명을 하기도 귀찮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맛있는 갈비와 참치뱃살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때문에 이 쪽 산업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면 왠지 죄책감이 더 커질 것만 같아 일부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래 인생은 짧은데 즐겨야지, 라는 모토와 가끔씩만 먹어주고, 먹을 때는 최대한 환경/동물 친화적인 재료를 선택한다는 단순한 합리화 -- 왠만한 사람들이 말없이 수긍하고 인정할만한 잣대--로 지내왔다.

하지만 이 주제는 점점 밀리는 방학일기처럼 마음 한켠에서 계속 불편함을 제공했고, 요리를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부터는 개학 전날밤의 초조함과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재료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많은 지식과 확실한 가치관을 기반으로 한 이유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의 무게. 그 결심의 첫걸음으로 이 책을 집어들었다. 
 
몇 장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상당히 기대가 된다. 저자는 매우 위트있게 불편하고 민감한 주제를 아주아주 원론적인 질문부터 소화하기 쉽게 다뤄나간다. 언제부터 우리는 육식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들이 있었는지, 푸아그라용 거위가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마블링을 위해 꼼짝 못하는 소가 느끼는 정신적 고통을 비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비교해서 도대체 어쩔건지, 일반 양계장의 닭과 들판을 뛰놀며 자란 닭은 정말 다른지 등등의 다양한 질문을 심도있게 다룬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과 가치관에 대한 논란을 떠나 음식과 문화/역사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뼈대로 잡고 얘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ps. 이 책을 읽고 나서 편한 마음과 확실한 소신으로 계속해서 육식을 할 수 있는 것이 나의 욕심이자 이기심이지만 여전히 (더) 불편한 진실로 남을지도 몰라 좀 두렵다 -_-


  1. 엄밀히 얘기하자면 force-feeding으로 사육되는 거위가 아니면 프랑스법에 따라 foie gras라고 부를 수 없으나, 일부 생산자들은 자연적인 사료섭취, 혹은 거위의 간이 자연적으로 제일 커져있을 때를 골라 도살하는 방법등을 통해 "foie gras"를 만들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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