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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08 와인 한 잔, 그 안의 오만과 편견 (16)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포스터. 출처 : http://layoutsparks.com>

날이 점점 더워지던 어느 초여름날 주말 저녁. 느지막히 낮잠을 자고 일어나 저녁거리를 생각하며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여느때처럼 그득한 한상차림이 되버려 마침 문자를 주고 받던 동네친구녀석을 불렀다.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친구의 손에는 화이트 와인이 한 병 들려있었다.

"웬 와인? 뭐냐?"
"아 이거 저번 와인세일때 만원 주고 산건데...아르헨티나 산이던가."

뭐야, 저가 신대륙 와인이잖아. 시큰둥한 표정으로 병을 건네받아 코르크를 따려고 보니 무려 돌려따는 스크류탑이 아닌가. 풋, 뭐 대충 파스타랑 먹긴 나쁘지 않겠군. 막(아무거나따라마시는)잔을 꺼내 두 잔을 넉넉히 따랐다. 

"역시 와인은 유럽이랑 미국쪽이 좋은 거 같아."
"그래도 싼 값에 마시는 게 있잖아. 자 짠!"

아무 생각 없이 잔을 입에 갔다대었는데 어라, 냄새가 향기롭다. 한모금을 벌컥 마시니 새콤상콤 향기롭게 은은하게 이어지는 맛.

언제부터 와인이 이리 좋아졌나. 분명히 요 애기만할때는 냄새만 맡고도 웩! 거렸는데
(그나저나 얘는 누구지......)
<출처 - http://www.gamitian.com>

한병을 싹 비우고 알딸딸하니 앉아있는데, 아까 원산지랑 가격, 코르크만 보고 피식거렸던 내 자신이 참 우스웠다. 언제부터 얼마나 와인에 대해 잘 안다고 그런 편견들이 생긴건지. 아니, 어쩌면 아는 것이 오히려 없고 어느정도 마셔봤다, 라는데서 오는 오만까지 겹쳐 와인에 대한 정직한 지식과 경험을 쌓는 대신 편견만 굳혀왔구나, 싶었다.

와인병을 갖다가 다시 찬찬히 보고 있는데, 문득 뉴욕에서 만났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뉴욕에서 이벤트 플래닝 인턴쉽을 하고 있을 무렵, 우리 팀에 제시카라는 이름의 또 한명의 인턴이 들어왔다. 나보다 나이는 조금 더 많아 보이고, 학력은 전문대 중퇴에 인상은 금발에 소위 완전노는애, 옷도 좀 촌스러운 야시시한 스타일. 난 그 여자를 '그러그러한' 부류로 확 찍어버리고 처음부터 오만과 편견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스타일. 내 블로그 정지먹진 않겠지 -ㅅ-
<출처 - http://s.bebo.com>

우리가 세달을 꼬박 일한 큰 펀드레이저가 열리던 당일, 해당모금의 수혜를 받는 몇명의 지체장애인들이 초대가 되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난 좀 불편해졌고 어떻게 그들을 '다뤄야' 할지 몰라 그냥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그 때 제시카가 도착했다. 휴, 역시 평소와 다름없는 차림. 

그런데 제시카는 그 장애인들을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너무나 환한 미소로 그들을 대하고 저녁을 챙겨주며 조곤조곤 성심성의껏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그들은 그녀와 너무 친해져 있었으며 마지막에 헤어질때는 진심어린 포옹과 함께 불분명한 발음이었지만 찬찬히 "Thank you, Jessica"라고 인사를 했다.

그 때 내가 느낀 창피함과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녀를 완전히 다시 보게 되었으며, 겉모습과 조건만으로 확고한 편견을 가진 것, 내가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고상한' 옷차림이라 해서 오만을 품은 것에 대해 크게 느끼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 나는 그녀와 아직도 연락하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던, 처음 보는 와인을 접하던, 겉으로 보이는 라벨과 조건에 막혀 그에 대해 제대로 알 기회를 가져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던 것은 아닌지. 그 후 새로운 와인을 접할 때면 그 날 저녁이 생각나 겸허해진다. 필요이상 잔돌리기, 마실때 므흣한 표정짓기, 고상한 포즈 취해주기 등 와인마시면서 들었던 부르주아 겉멋들도 버리고.

그래도 가끔은? 으흐흐...
<출처 - http://www.seriouseats.com>

결국 와인은 술이다. 그 깊은 역사와 장인정신, 다양한 버라이어티가 맛보고 공부하기에 너무나도 흥미로운 토픽이지만, 와인 관련해 가장 즐거운 기억은 대학교 마지막 학년에 매주말 친구들과 왁자지껄 모여 이것저것 맛을 보고, 마치 우리가 와인에 대해서 잘 아는양 한껏 떠들어대다 결국엔 겔겔 취해서 다음날 베트남 쌀국수로 같이 해장하던 기억. 영화 Sideways를 보면서 고상함과 오만을 떨어대는 코믹한 주인공들을 보며 놀려대던 기억. 그런 기억들이지 않나 싶다.

영화 Sideways의 한 장면. 무려 껌 씹으며 와인테이스팅을 아하하.
<출처 - http://static.guim.co.uk/>

ps. 나중에 알게 된 아르헨티나 대표 품종인 Torrontes란 그 와인은 그 후 나의 사랑을 듬뿍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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