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수타면'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4.26 인터넷과 부엌은 위험한 곳이다 (12)
  2. 2010.04.19 칡뿌리와 수타면 (6)
정확히 몇시간인지는 모르지만, 하루 중 내가 인터넷에서 보내는 시간은 좀 챙피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대게 컴퓨터 앞에 않으면 먼저 이메일 확인으로 워밍업. 메일을 보다보니 트위터에 새로운 팔로워가 생겼다는 반가운 알림메세지. 유후거리며 트위터에 로그인해 프로필을 보려다가 새로 올라온 몇십개 메세지에 잠시 한눈팔림. 읽다가 누가 독일 와인에 관한 질문을 올렸는데 윽, 답해주려니 예전에 다 배운거였는데 기억 하나도 안난다. 당황해서 즉시 독일 와인 검색해 나오는 글들 한 번 섭렵해주고 일시적인 안도감에 잠시 안정을 취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싸이서 방명록 남기고 클럽들 들려서 새글 확인하고 창을 닫으려는데 네이트온에서 친구가 웃긴거라며 동영상 링크를 보내준다. 보면서 한참 키득대다 관련 동영상들 몇 개 클릭클릭. 잠깐, 이메일 확인 아직 다 못했는데.  

이러다 보면 오늘은 11시에 잠들자, 라는 결심은 안드로메다에 가 있기 태반. 그러나 나에게 인터넷만큼 조심해야 할 곳이 있다면 바로 부엌. 한 번 발을 담그기 전에 스스로 정신차리지 못하면 오늘밤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오늘 비도 추적추적 오고, 자격증 시험 공부에 운동도 해야하고 빨래도 밀렸는데 집에 오니 벌써 일곱시반. (마을버스 평소 십분거리 무려 40분걸림 웩.) 대충 씻고 공부할 거리를 뒤적거리다보니 출출해졌다. 오늘은 할일이 많으니 대충 때워야겠군, 하면서 냉장고 앞을 알짱거리다가 라면을 발견했다. 오늘 하루종일 좀 잡스럽게 군것질을 많이해서 약간 건강스럽게 만들어줘야 할 것 같은 압박에 냉장고를 열었다. 흠, 유통기한 3일 지난 우유라, 패스. 곰팡이 핀 치즈(비싼건데 왕짜증)도 패스. 오, 애호박 짜투리와 표고버섯이 있다. 앗싸. 어라, 양파도 있네. 아 맞다, 그제 잡고 얼린 닭도 있지.

주섬주섬 라면토핑(?)을 챙기다보니 어느새 식탁위에는 나름 괜찮은 재료들이 수북히 쌓였다. 갑자기 조미료와 튀긴 면빨따위로 오염시키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며 계획 급수정. (이때 정신차리고 멈춰야하는데 말이다) 간장에 설탕에 파, 마늘, 생강까지 다져주고 레몬즙까지 넣어줬다. 닭과 버섯을 재우고 돌아섰는데...밥이 없다. 국수는 있나? 

동서남북 찬장과 서랍을 다 뒤졌는데 나온건 스파게티면 몇가닥 뿐이었고.  아, 결국 라면에 볶아야 하나 잠시 좌절하다가 순간 (정말 정신이 나갔는지) 저번에 만들었던 칼국수면처럼 수타면으로 만들면 대박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가루랑 물 반죽하다 시계를 보니, 헉, 아홉시...

신나게 볶아서 먹고 소파에 잠시 앉아 정신을 차려보니 설겆이는 한가득에 완전 피곤이 몰려왔다. 

공부해야지...
빨래해야지......

하며 주니를 끼고 티비를 보다가 깜박 졸았는데. 일어나니 이제 정말 잘 시간.

오늘도 이렇게 말렸다. 

ps. 문제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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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책 읽는 것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즈음 전까지는 자기전에 네다섯권씩 머리맡에 쌓아놓고 등 하나 켜 놓은채  늦게까지 책을 읽다 학교에 지각하는 것이 굉장히 잦았다. 그 중 제일 좋아했던 책들 중 한권은 Laura IIgals Wilder(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시리즈의 첫 권인 Little House on the Prairie(초원의 작은 집)였는데, 정확히 세 본 적은 없으나 아마 일백번이 넘게 읽도록 읽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을 세계 전집으로 접하신 분들도 꽤 있겠지만, 간략히 내용을 설명하자면 아버지 어머니 딸 셋으로 이뤄진 미국의 한 가족이 서부로 이주하면서 초원에서 집짓고 밥짓고 농사짓고 우물파고 소기르며 말타며 사는 알콩달콩 모험기이다. 어떻게 보면 사소해 보이는 이 얘기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의 셀러가 되고 내가 백여번씩 읽은 이유는 일상적인 것들을 굉장한 디테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직접 벤 나무를 일일이 반으로 갈라 바닥에 깔아 근사한 마루를 만든 후 또 일일이 손으로 훑으면서 나무가시가 없도록 확인하는 일이라던지, 직접 우유를 짜 몇일에 걸쳐 저어주며 당근즙을 짜 넣어 버터를 만든다는 일이라던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마루, 버터, 문, 우물, 옥수수가루 등등을 직접 창조해서 장만해 가는 스토리 한 문장 한 문장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고, 머릿속에 그 장면들을 그리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희열과 기쁨을 느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라면서 나에게 직접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최고의 관심사였다. 집에서 어머니가 케익을 구울때면 귀찮으리만큼 옆에 붙고 끼어들었고, 학교에서 제일 재밌는 수업은 토마토를 키우고 바느질을 배우는 가정 시간이었다.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누가 직접 고추장을 담구거나 치즈를 직접 만들었다는 포스팅을 발견하면 옛날 '초원의 집'을 읽을 때와 같이 완전 흥분하는 것은 예사. 방학때는 대부분 두유 만들기, 두부 만들기 등의 실험을 하며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렇게 '직접 만들어 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냐고? 글쎄, 그러게 말이다. 슈퍼에 가면 이미 다 편리하게 만들어져 있고 포장도 되어 있고 두부 한 모에 십만원씩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마 전 잡지를 읽다 너무 고마운 칼럼을 발견했다. 아마 한겨레였던 것 같은데, 이찬웅 씨라는 박사과정을 준비하시는 분이 쓰신 '칡과 커피'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저자가 어렸을 적 전근간 시골의 학교 친구들은 정확하게 주변과 뿌리의 겉만 보고 달달한 칡뿌리가 어떤 건지 금세 알아낼 수 있는 '감성'이 있었고, 그건 절대 쉽게 몇 번의 연습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친구들은 단순히 이미 수확되고 다듬어지고 포장된 칡뿌리밖에 접한 적이 없는 아이들과 달리, 그 이상의 연결고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훌륭한 글을 망치기 전에 한 문단 인용을 하도록 하겠다(사실 귀찮음...응?):

커피는 브라질·콜롬비아 어느 고장의 것이다. 뛰어난 감성은 그곳에 가닿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은 상품화 때문이다. 상품화는 이익을 내기 위해 선을 분절한다. 재배와 소비는 직접 연결되지 않고, 농장·하청·착취·수입·유통·광고·판매·할인 등으로 조각난 단계를 거쳐 연결된다. 원두커피를 매장 테이블에 늘어놓고 원주민들의 사진을 원용하면서 조각난 선을 상상적으로 연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분절된 연쇄의 끝에 대도시가 있고, 도시는 상품의 출력 단자로 포위된다. 그에 맞춰 소비자의 감각은 입력에 반응하는 단말기에 가까워진다. 이런 경우 단말기가 아무리 정교해지고 복잡해지더라도, 그것은 감성의 수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문단을 읽는 순간, 난 무릎을 탁 쳤다. 난 단순히 맛있는 커피의 은은하면서도 다크한 스모크와 초콜렛 향을 느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빈이 익어가는 농장의 모습, 수확하는 인부의 모습, 상업화로 인한 폐해, 공정거래의 시스템과 중요성 등을 함께 느끼며 그 선들을 이어가고 알고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밤 저녁은 직접 만든 손칼국수. 면을 우리밀과 정수기 물, 천일염으로 직접 반죽하고 원하는 굵기와 길이대로 재단하면서(이것도 직접 만드는 것의 대단한 장점이다) 엄청 뿌듯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자랑스러운 마음에 인터넷 서핑을 좀 하고 있는데 평소 내가 즐겨읽는 블로그 쥔장 밥 아저씨 왈, 파는 밀가루들이 맘에 들지 않아 직접 밀을 갈아 파스타를 만들었다..........난 이제 밀을 직접 재배해야 하나?

참, 국수 직접 밀면 농담 아니고 몇십배백배천배 더 맛있다. 진짜 비교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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