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퇴근길에 배가 고픈데, 약속은 깨졌고 연락되는 친구도 없고, 집에는 라면밖에 없으며, 장어덮밥이 무지 땡긴다. 내가 좋아하는 돈부리 집도 집에 가는 길이다. 그렇지만 혼자 들어갈 용기가 없다. 그래도 그 앞을 슬슬 지나가 본다. 안은 전부 삼삼오오 모임과 연인들 투성이다. 문앞까지 다가가보나 역시 망설여진다. 그러나 문틈사이로 흘러나오는 덮밥냄새에 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간다. 

"몇분이신가요?"

"아, 저기 그냥 저..."

"혼자 오셨나요?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치없는 종업원이 대빡 큰 목소리로 비수를 꽂는다. 사람들이 어휴 저 루저하고 쳐다보는 것 같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꺼내어 열심히 메일을 보며 바쁜 척을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없고 달아오른 얼굴에 굳어지는 어깨에 빨리 먹고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하다.

이제 스마트폰으로도 할 게 없다. 게임을 하면 너무 없어보인다. 읽은 메일 또 읽고 또 읽고. 친구녀석들은 답문자도 없다. 아 장어덮밥은 장어를 잡으러 갔는지 아직 냄새도 풍기질 않는다. 괜시리 사색에 잠긴 척 포스를 잡아본다. 옆에 앉은 커플을 슬쩍 보는데 오호, 남자가 훈훈하게 생겼다. 그런데 밥 열심히 먹고 있던 여친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진다. 다시 폰을 꺼내 열심히 문자보는 척 한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밥이 나왔다. 이런 자태만 아니었음 그냥...
<출처 - http://dasu7422.egloos.com>

근데 시킨 장어덮밥에 딸려나온 새우튀김 몇 개. 으잉, 안 시켰는데요, 하는 눈빛으로 서빙해준 조리사를 쳐다보니 서비스란다. 한 입 베어물었는데 와사삭, 너무 맛있다. 보통 빵가루 튀김과는 좀 다른 느낌. 튀김을 물끄러니 보고 있자니 조리사 아저씨, 맥주를 좀 섞어 튀기면 더 바삭하단다. 물론 반죽은 차게. 새우는 사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전부 다 먹어야 더 맛있다는 말씀꺼정. 요새 새우들이 좀 비실비실 했는데 모처럼 좋은 놈들이 들어와 신난다며 새우 싱싱한 거 고르는 것에 대한 노하우, 어디서 사면 좋고 등 얘기를 듣다보니 아까의 조급함과 멋쩍스러움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나도 모르게 열심히 아저씨와 새우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슬쩍 건네준 녹차 아이스크림 한 입으로 입가심을 하고 집에 오는 길, 바에 앉아서 혼자 먹는 경험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이후, 나는 식당이던 카페던 바가 있으면 일부러 혼자 찾아가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출장에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바에 앉아 미국으로 이민온 느끼한 이탈리안 아저씨랑 와인 한 잔 쨍하며 파스타와 와인에 대해 한 수다를 떨고, 한 술집에서는 역시 바에 앉아 잘생긴 바텐더와 여자들의 추근댐을 받는 잘생긴 바텐더의 숨겨진 애환에 대해서 깊은(?) 얘기를 나누고, 서울의 한 카페에서는 바에 앉아 바리스타분과 필리핀/태국 여행 경험담 공유를 하다 드립커피까지 배우게 되었다. 

좋아하는 곳에 아래와 같은 바가 마련되어있다면, 혼자 찾아가 자신에게 특별하고 멋진 경험을 선사해보길 바란다. 물론 오픈마인드와 약간의 철판은 필수!
<출처 - http://goodiesfirst.typepad.com>

물론 좀 더 즐겁고 풍부한 경험을 하려면 체인점들보다는 뭔가 해당분야에 대한 내공과 열정이 느껴지는 곳이 좋겠다. 아무래도 돈 벌기위해 겉핥기 식으로 에스프레소 기계 사용 배워서 내리는 아르바이트생 바리스타와 정말 커피를 사랑해 오랫동안 시간을 투자하고 커피농장도 다녀와 본 고수 바리스타와는 나눌 수 있는 정보의 차이가 있으므로. duh.

내가 저번달에 gYul님의 포스팅을 읽고 감동받아서 바로 찾아간 커피킹도 바로 그런 곳이다. 커피에 대한 열정과 포스를 느낄 수 있고, 바에 앉아 바리스타 분과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나눌 수 있는 곳.

어느 카페보다 맘에 들었던 메뉴.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객관적이고 자세한 맛의 기준.

바로 앞에서 내 커피 한 잔이 내려지는 광경을 경험하며

커피 한 잔을 통해 오가는 인연과 이야기들. 단순히 커피 한 잔 이상의 값어치.

벽에서 떼오고 싶었던 액자. 별 의미없는 화려한 미술작품보다 커피에 관한 신기하고 재밌는 포스터들. 

자세한 위치는 gYul님 포스팅 참조. 커피 향기뿐만 아니라 가게에 흘러넘치는 훈훈한 사람 향기와 정성, 그리고 열정을 느껴보고 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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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등학교 후배를 오랜만에 만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계산을 하고 일어서는데 쿠폰을 나누어 주며 맞은편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 한 잔은 무료라는 것이다. 큰 3층짜리 건물에 사람도 많고 해서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데 커피향기대신 큰 커피체인점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큰 커피체인점들을 내가 싫어하는 이유는 커피에 대한 정성을 전혀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작동하는 방법과 레시피들만 배운 소위 '바리스타'라는 사람들은 입이 델 정도로 뜨겁고 쓰디쓴 커피를 일회용 컵에 부어댄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역시 펄펄 끓는 상태로 배달. 그리고 난 종이컵에서 느껴지는 그 은근한 신문지 냄새며 왁스도 좀 꺼림칙해서 웬만하면 머그잔에 달라고 하는데, 결국 두시간 있는 동안 반도 못 마셨다. 휴.

그 실망감을 달래기 위해, 오래전부터 나의 아지트인 강남역 레이나(LEINA)를 간만에 찾았다. 레이나는 맛집과 음식문화의 불모지인 강남역에서 유일하게(내가 알기로는) 드립과 사이폰 커피를 맛볼수 있는 소중한 곳. 

역시 온도계가 꽃혀있는 주전자들. 그 뒤로 분주한 바리스타 언니.

나는 파나마 산, 친구는 멕시코 산 커피를 시켰다. 각각 드립과 사이폰으로. 바로 드립 들어가시는 곽 바리스타님. 나중에 알고보니 관련 대회에서 상도 타신 분.


마지막에 여과지가 갈색으로 물들며 커피 거품이 풍성하게 올라오는 저 순간, 너무 아름답다.

한김 꺼지며 슈욱 가라앉는 고운 거품.

짜잔. 이 곳은 잔들도 다 너무 예쁘다. 커피 마시는데 종이컵과 이런 컵의 차이는 분명히 느껴진다.

과일 맛이 감돌고 약간의 산도가 느껴지는, 긴 여운이 남는 훌륭한 커피 한 잔. 며칠 전 느꼈던 실망감을 한 번에 내려주는 따뜻한 한모금.

친구 커피는 사이폰으로 축출. 샌프란도 그랬지만 사이폰은 대부분 일제품.

서빙을 기다리는 커피.

수다를 떨며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바리스타 분이 콜럼비아 커피를 샘플로 한 잔 내려주시는 것이 아닌가. 세가지를 비교해 보면서 마시는데 요것은 약간 더 보리차 같은 구수함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나중에 조인한 친구는 예카치프를 시켰는데, 사이폰과 드립 중에 고민하다 사이폰으로 주문하니 나중에 드립으로 내린 버전을 샘플로. 그렇게 계속 조금씩 얻어먹다 보니 내 앞에 수북한 잔들.

정성을 들여 내린 커피는 식어도 맛있다. 오히려 더 달달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점차 변화하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커피는 굉장히 많은 연습과 지식이 필요하며 관련된 역사와 문화도 엄청나게 방대한데, 커피 원두를 돈으로 보며 막 태우고 막 갈고 막 내리는 커피샵들을 보고 있으면 난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그런 곳들에게 공정무역까지 기대하는 것은 정말 영 무리인 것일까? 저 멀리 남미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땀흘리며 고생한 농부의 손길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커피 한잔을 내리는 비법은 그 원두를 정성과 관심으로 소중하게 다루고 최선을 다해 내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여튼, 레이나에서 깜짝 테이스팅을 하게 되어 매우 즐거운 저녁이 되었다. 커피 좋아하시는 분들은 바에 앉는 것을 추천드린다. 바나 레스토랑과 마찬가지로, 바리스타나 바텐더, 주인들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고 딸려오는 서비스까지, 완전히 다른 경험을 맛 볼 수 있다.

레이나는 강남역 시티극장 바로 뒷 골목(7번 출구 뒷골목) 2층에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 맛보았던 와플도 맛있었던 기억. 아주 옛날의 소박함은 이제 덜하지만 여전히 커피를 사랑하고 아끼는 실력파 바리스타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니 강남역에서 좀 특별한 공간을 원하시는 분들은 한 번쯤 들려보시길. 물론 원두도 판매.
 
ps. 마지막엔 미니 핫초코 한 잔 타주시는 센스까지!

pps. 커피 숙취는 술 숙취보다 더 무서운 것 같다.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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