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2011년 첫날은 계획했던 것과 달리 한국에서 주니와 단둘이 보내게 되었다. 전날밤 느지막히 집에 들어와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며 우리 제빵왕 탁구가 우수상 타고 펑펑 우는 것도 보고 티비에서 틀어주는 타종소리를 들으며 연중행사인 남산 하얏트 호텔의 불꽃놀이 구경 후 바로 곯아떨어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그래도 새해 첫날 아침인데, 깨끗이 목욕재개하고 라면이나 식은 밥 대신 뭔가 제대로 된 프레시한 음식을 섭취해줘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연말에 손님맞이 몇 번 한턱에 너저분한 주방부터 치우기 시작. 설거지를 하다 보니 이리저리 때가 낀 토스터며 주전자며 오븐이 눈에 들어온다. 이왕 하는 거 싱크대도 개수대도 한번씩 닦아줘야 할 것 같아 철수세미와 클리너를 주섬주섬 꺼냈다. 


대강 한번 치우고 나니 두시간여가 훌쩍 흘렀다. 완전 배고프다. 얼른 그냥 끼니를 때우고 싶은 귀차니즘이 몰려왔으나 그래도 1월 1일인데, 하며 마음을 다잡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보름 넘게 사람없이 집이 비어있던터라 유통기한 지난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상해보이는 반찬. 찰랑찰랑 남아있는 우유 한통. 문드러진 -_- 부추 한 단. 

눈에 띄는 것들을 버리고 나니 냉장고에 상당히 오랫동안 살고 있던 소스병들이 찝찝하다. 음, 역시 마요네즈는 버릴때가 되었군. 겨자도 간당간당하다. 아, 그러고 보니 냉동고도 있다. 묵혀두었던 쿠키반죽에 얼린지 일년 다 되가는 새우 몇 마리, 언제부터 냉동실에 상주한지 절대 알 수 없는 미숫가루까지. 


으아 속이 다 시원하다. 싹 비워내고 나니 쓸만한 재료들이 보이나 참 랜덤하다. 두부 반 모. 양배추 반 개. 당근 두 개. 양파 하나. 얼린 소고기 조금. 메추리알. 청양고추. 오뎅 반팩. 스파게티와 마카로니 반봉지씩. 거기다가 칠리용 콩 한캔. 푸핫... 


오뎅과 양파, 튀긴 두부를 볶고 메추리알과 청양고추는 간장에 졸이기 시작. 칠리용 콩은 양파, 당근과 양배추, 고기를 다져서 넣고 간만에 칠리를 만들었다. 체다치즈가 없는 것이 눈물나게 아쉬웠지만. 그리고 부엌에만 들어서면 오븐 돌리고 싶은 이 어쩔수 없는 본능에 남은 밀가루 탈탈 털어 빵 반죽도 시작했다. 청소는 다 해놓고 귀차니즘으로 인해 메치지 않아도 되는 5분빵으로. 

깨끗한 부엌에 반죽 발효 시켜놓고 반찬 싹 해서 차려놓고 나니 뭔가 제대로 새해를 시작하는 느낌. 2011년은 항상 이렇게 개운하고 정리된 마음이길!


ps. 떡국 아직 못 먹었다 -_-... 난 아직 스물일곱 으하하


며칠 전 레스쁘아에서 스테이크를 다시 먹을 기회가 있었다. 반뼘은 되어보이는 정말 두툼한 안심. 잘라보니 겉은 거의 바삭할 정도의 진한 갈색이지만 중앙은 루비를 연상시키는 선홍빛. 멋진 그라데이션의 제대로 미디엄레어(개인적으로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 굽기). 

<이미지 출처 - Google Image Search>

그런데 스테이크는 도대체 언제 원하는 상태가 되었는지 알까? 온도계를 찔러보자니 육즙이 새고(폼도 안나고) 시간을 재는 건 재료와 크기, 두께, 팬의 온도 등등등등 변수가 너무 많아 불가능하고. 제일 많이 이용되는 방법은 바로 핑거테스트(finger test). 한마디로 손으로 눌러 고기의 푹신함을 테스트하는 것. 그렇지만 사실 어느 정도 익은 후에는 그 차이가 매우 미세해 연습에 연습을 통해 정말 고기와 친해져야지만 미디엄레어와 미디엄의 차이를 날렵히 찝어낼 수가 있다. 

심지어 이런 차트도. 실제 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지 출처 - Google Image Search>

주방에서 기구보다는 사람의 감각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더 빠르기도 하고, 많은 변수들에 의해 그때그때 다른 온도나 간으로 맞춰야 할때도 있고. 무엇보다 고기의 푹신함의 정도, 소스가 흐르는 정도, 데친 숙주의 투명한 정도, 반죽의 말랑한 정도, 이걸 잴 수 있는 도구는 손가락 감각 외에는 없지 않는가? 매뉴얼을 만든다 하더라도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스펙트럼은 약간 말랑, 살짝 말랑, 상당히 말랑, 꽤 말랑, 아주 말랑, 심하게 말랑, 너무 말랑..........이 정도. 거기다가 결국 추가 묘사가 들어간다 하더라도 잘 익은 토마토, 지점토 반죽 등 이전에 손으로 만져본 적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심지어 미국 요리학교 CIA의 Pardus 셰프가 실제 클래스에서 새우를 삶는 것에 대해 강의하는 동영상을 보자. 새우를 너무 뜨거운 물에 삶으면 고무처럼 단단해지기 때문에 좀 더 낮은 온도의 물에서 포칭(poaching)을 시키는데, 이때 적절한 물 온도를 맞추는 방법은 온도계가 아닌 ouch-hot 방법. 손가락을 담갔을 때 화상을 입거나 으 뜨거운데가 아닌, 앗 뜨거!의 느낌이 와야 적절한 온도란다. 으핫.

이런 "감"이 필요한 요리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요리는 감각이 있어야만 한다는데, 여기서 말하는 "감"은 타고난 것이 아닌 무수한 반복을 통해서 몸에 쌓이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김연아가 태어났을 때부터 점프를 잘 뛴 것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적절한 타이밍과 파워 등의 "감"이 몸에 밴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감각은 놀랄만큼의 적응력과 발달능력이 있기 때문에 결국 훈련시키기 나름이다. 사실 이것은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평소에 쓰는 맛소금 대신 천일염을 사왔는데, 평소와 동량을 썼더니 싱거워 양을 늘려 간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재료와 음식에 내 몸이 반응하는 교감의 시작이다. 요리를 하면 할수록 이 "감"들이 몸에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데, 어느 순간 예전보다 작은 차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발전해가는 그 즐거움이란!

ps. 난 개인적으로 제일 오래한 작업이 빵 반죽인데, 처음 밀가루와 물을 섞을때 손가락을 꽉꽉 찔러주며 반죽 제일 내부의 습도를 체크하며 치대게 된다. 손가락 끝으로 마른 정도를 느끼며 밀가루와 교감(...)을 하게 되는데 이때 가끔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들이 새(?)를 탈때 서로 안테나(?)를 붙이는 장면이 생각난다 -_-.......


어릴 적 초등학교 소풍날, 제일 기다려졌던건 동물원 견학도 아니고 보물찾기도 아닌, 바로 새벽부터 일어나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까먹는 시간이었다. 따뜻한 상태로 배낭에 담겨져 참기름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있는 반질반질한 김밥들.

친구들의 생김새나 성격만큼 각자 싸온 도시락들도 가지각색이었다. 야채를 절대 먹지않는 준영군의 김밥은 햄, 맛살, 단무지, 어묵 사총사 김밥. 항상 아기자기한 문구들을 들고 다니는 선희양의 도시락은 그애의 필통을 연상케 하는 알록달록한 색감에 선희 어머니가 가위들고 엄청나게 공을 들이셨을 법한 헬로키티 생김새의 주먹밥. 밥보다는 햄버거와 핫도그를 좋아하는 동희군은 역시나 샌드위치와 절대 먹지않는 방울토마토 몇개. 우리집은 무려 설탕과 식초에 직접 담근 단무지에 시금치, 소고기, 우엉, 당근으로 무장한 정석 옛날 김밥. 


역시나 제일 주목을 받았던 건 뚜껑을 열었을 때 우와~ 하는 리액션을 받는 정성 이백프로의 도시락들이었다. 그렇게 주목을 받은 친구들은 매우 우쭐해했고, 다른 아이들은 다음 소풍때는 꼭 내가 주인공이 되리라 다짐하며 엄마들을 들볶는 현상이 발생. 나도 문어모양의 비엔나 소세지와 곰돌이 모양의 주먹밥으로 찬양을 받고 싶었지만, 이미 김밥 한 종류를 싸기 위해 어머니가 새벽 다섯시반부터 일어나는 걸 알기에 어린 마음에 차마 조를수가 없었다(사실 무서워서...).

도시락의 주된 주인공인 김밥은 사실 싸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 메뉴인데, 몇년전에 우후죽순처럼 생긴 천원김밥 체인점들과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밥 80% 김밥들 덕분에 싸고 쉽게 접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맨밥에다가 요새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김밥용 단무지, 우엉, 햄, 맛살 등으로 넣고 싸면 한 십분만에 둘둘 싸겠지만, 정말 맛있는 김밥을 싸려면 좀 더 시도해 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김밥 업그레이드 하기 그 첫번째 : 김밥의 기초는 맛있는 밥! 우선 밥은 평소보다 물을 약간 줄여 고슬고슬하게 지어주기. 그리고 무심코 지나치거나 귀찮아서 스킵하기 쉬운 것이 바로 밥에 간을 하는 것인데, 확 달라지는 김밥을 경험하려면 단촛물로 간을 해준다. 식초, 설탕, 소금을 3:2:1의 비율로 혼합해 밥이 뜨거울 때 잘 섞어주면서 약간 새콤한 맛이 돌게 한다.

김밥 업그레이드 하기 그 두번째 : 가공재료는 최대한 자제하고 고기와 야채를 직접 조리해서 넣어보자. 그래, 단무지 직접 담그는 건 좀 오바이겠지만...햄 대신 다진 소고기나 표고버섯을 볶아서 넣고, 추가로 오이나 시금치를 슬쩍 데쳐 넣거나, 당근을 채쳐 살짝 볶아 넣으면 훨씬 더 깊은 맛의 김밥을 맛 볼 수 있다. 물론 각 재료에도 적절한 간을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밥 업그레이드 하기 그 세번째 : 재료는 풍성히, 밥은 조금만. 김밥을 싸다보면 나도 모르게 밥의 양이 많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김의 한 3/2만 밥을 깔아준다. 이 때 김이 중간에 슬쩍슬쩍 보일 정도로얇게 펴주는 것이 포인트. 하얗게 꾹꾹 밥을 깔면 양이 너무 많아진다. 이렇게 밥을 깔고 재료를 엄지마디 정도 넓이와 높이로 넉넉히 얹어주면 딱 한번만 말리면서 좀 더 맛의 발란스가 맞는 김밥이 된다. 

김밥 업그레이드하기 그 마지막 : 달군 팬에 한번 굴려서 참기름을 살짝 발라준다. 김밥용 김은 조미가 되어있지 않고 좀 뻑뻑할 수 있으며, 꾹꾹 눌러가며 김밥을 말다보면 김이 좀 밀려서 구겨질 수 있다. 이때 다 말은 김밥을 살짝 가열한 후라이팬에 슬슬 굴려가며 데워주면 빠방해진다. 여기에 참기름을 살짝 발라주면 훨씬 더 고소한 김밥 완성!

김밥과 같이 싸면 모양도 이쁘고 맛도 좋은 동그랑땡.

얼마전 화창한 날 여의도공원에서 도시락 까먹었더니 너무 환상적이었다. 몇번 더 하려 했는데 입돌아가게 추워진 날씨라니...

커피 매장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키고 기다린다. 매장안은 칙- 하는 증기소리와 더운 물의 열기로 가득하다. 받아든 커피에서는 수증기가 모락모락 난다. 

이 장면이 익숙한 이유는 커피는 보통 열을 사용해 커피의 맛과 성분 등을 원두에서 추출하기 때문. 뜨거운 물을 직접 부어주는 드립커피부터 증기와 압력으로 찐하게 뽑아내는 에스프레소까지. 이 모든 열을 생성하기 위해서 전기 등의 에너지가 꼭 필요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역시 예외는 있다. 바로 더치커피(Dutch Coffee). 조용히, 중력만을 이용해 찬물로 뽑아낸 아주 부드러운 커피다. 


가끔 카페에서 마치 화학실험기구 같은 유리병들을 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더치커피를 내리는 기구이다. 시스템은 아주 간단하다. 원두를 갈아 찬물을 아주 조금씩 흘려보내고, 그 밑으로 떨어지는 커피를 받는 것.  그러나 수분 이내로 내리는 일반적인 커피와는 달리, 더치커피는 평균 12시간이라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커피가루를 두텁게 쌓고, 물을 한방울씩 떨어뜨려 한방울 한방울에 깊은 맛이 배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열이 있어야 추출되는 원두의 지방이나 카페인 등의 다른 성분들은 대부분 배제되어 몸에 부담이 덜 가는, 깔끔한 맛의 커피가 탄생된다.

더치커피는 브랜디 향이 강하다(한마디로 술맛이 난다 후후). 오랜 시간을 거쳐 내린 더치커피는 와인처럼 숙성기간을 거치는데, 이후 향이 더욱 더 깊어진다. 보통 1주일 안에 소비하는 것이 그 향과 맛을 신선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

많은 로스터리 카페들이 이미 더치커피를 판매하고 있지만, 홍대의 미즈모렌이란 더치커피 전문점이 있다 하여 추석전날 놀러가 봤다. 그렇다. 바로 서울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려 홍대입구역과 광화문역 침수된 그날. 덕분에 미즈모렌에 꼼짝없이 같혀(?) 더치커피 제대로 탐방.

미즈모렌에 들어가면 한켠에 놓여진 여러대의 큰 더치커피 기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 카페에 한대씩 있는데 이곳은 더치커피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는 것이 확 다가온다. 

우선 더치커피 주문!

영롱한 갈색의 커피 한잔이 테이블에 놓여졌다. 기대를 갖고 한모금 입에 머금었는데......와,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방문하기 전에도 여러곳에서 더치커피를 마셔봤지만, 이곳의 커피는 정말 부드럽고 깔끔했다. 거기다 유난히 깊은 향. 상쾌함이 느껴졌다. 내가 잘 쓰는 비유인 바로 수돗물 마시다 생수 마시는 느낌!

시원하게 내리는 장대비 소리를 들으며 치즈케이크 한 조각과 서비스로 나온 생초코렛을 곁들여 여유로운 오후.


그나저나 더치커피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궁금해 찾아봤는데, 정확한 기록은 없고 네덜란드 상인들이 뱃길을 오가면서 향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내렸다는 정도의 얘기만 있다. "Dutch Coffee"로 구글에서도 찾아봤는데 별 나오는 내용이 없고, 찬물로 내린다는 뜻의 "cold water brewing coffee" 기구는 파는 걸 보아하니 더치커피라는 명칭은 그리 공식적은 아닌 듯. 간단한 기구만 구비하면 집에서도 쉽게 내릴 수 있다는데, 언젠가 한번 도전해봐야겠다. 

미즈모렌의 정확한 위치는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11-12이며, 상수역과 매우 가깝다. 특이한 커피맛이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쯤 들려보시길!



ps. 커피는 맛있게 마셨으나 좀체 그치지 않는 비 덕분에 발목위까지 차는 물살을 헤치며 지하철역으로 가야했다. -.-

9월 30일, 이번주를 마지막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 요리와 음식의 세계에 올인하기 위해서.

미쳤냐는 소리, 듣기도 했고 듣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잘나가는 글로벌 IT 대기업. 안정적인 생활과 월급. 공짜점심과 수십가지 혜택들. 직장 이름만 대면 끄덕대며 길을 내주는 사회. 이미 이 분야에 투자한 3년여. 

그러다 어느날, 한 모임에 참석해서 한참 서로 소개를 하고 있는 와중, 누가 물어왔다. "그럼 구글에선 어떤 일을 하세요?" 여러가지 잡다한 프로젝트,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어떤 한가지도 내가 이런일에 전문가다, 이런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라고 정확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대충 종합해서 얼버무리니 아, 참 좋은 회사 다니시네요. 좋으시겠어요. 대단하시네요. 공부 되게 잘하셨나봐요. 쏟아지는 찬사(?)들. 그렇지만 난 먹먹하고 답답했다. 

그러나 급격히 저하되는 내 열정과 집중력에도 불구하고 일이 손에 익어서 그런지 매니저와 주변동료들의 피드백은 한결같이 좋았다. 이번 분기에도 아주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던지, 역시 우리 팀에 꼭 필요한 메이트라던지. 그렇지만 그런 피드백이 반복될수록 나는 더 괴리감을 느끼고, 내 노력과 열정과는 전혀 비례하지 않는 것을 깨달으며 점점 태만해져갔다. 

하지만 요리는 달랐다. 마침 양식자격증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그 때 절실히 깨달은 것은 접시에 담긴 완성물은 내 실력과 내 노력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대변한다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자만하거나 1초라도 집중력을 놓치면 반드시 그 티가 났다. 반대로 내 자신을 매순간 채찍질해가면서 백프로를 투자한 날은 항상 선생님의 긍정적인 코멘트를 받을 수 있었다. 바로 그렇게 내 자신을 끝없이 돌아보게 하는, 한없이 겸손해지게 하는 요리의 정직함이 너무 좋았다. 

그 매력에 빠져들어 점점 요리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던 와중, 샌프란시스코로 출장 기회가 생겼다. 그곳에서 시도해 볼 식당들과 가게들을 뒤지던 도중, 호텔 바로 근처에 위치한 요리보조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 급식소를 알게 되었다. 토요일 오전 8시에 까야 할 양파는 백개이상. 다질 피망도 백개 이상. 그렇지만 야채를 다듬고 다지는 그 몇시간 동안 난 마치 명상하는 기분처럼 너무 차분하고 편안했다.

야채도 손질이 끝나고, 이런저런 준비 후 셰프를 도와 끓인 스튜를 다른 음식들과 함께 요앙원 노인분들에게 서빙할 차례. 서빙을 다 마치고 나도 한 그릇 떠서 빈자리가 하나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튜를 먹고 있던 한 할아버지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여기서 일하냐고, 이걸 먹고 있으니 예전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주말마다 끓여먹던 스튜 생각이 난다고. 그랬더니 맞은편에 계신 다른 할아버지는 당신 아내가 끓여주던 검보(미국 남부의 진한 스튜 종류)가 최고라고. 직접 기른 옥수수를 넣었었다며 마구 자랑을 하셨다. 그 후 한참 이어진 옛날 미국음식들에 대한 얘기.

그런데 대화 도중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내가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사람들과 교감하고 그로 이어지는 이야기들과 생각. 잠시 실례를 하고 화장실로 자릴 피해 행복감에 엉엉 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이란 것을.

물론 그 이후에도 한번에 회사에서의 많은 혜택들, 사회적인 인지도와 안정을 포기하긴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와 비슷한 경험을 미리 하신 많은 분들의 경험담들이 큰 용기를 주었다. 1년 가까이 차츰차츰 마음을 다져가던 어느날, 지금 아니면 평생 후회할 것이란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고 자진백수전환을 결국 실행에 옮겼다.

지인이 보내준 가수 김동률씨가 동생에게 쓴 글귀의 일부로 글을 마치며, 다시 한번 열심히 해보겠다 다짐한다. 화이팅!

자기 이름을 걸고 무엇인가를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에 대해
또 그걸 돈 주고 사주십사 하는 것에 대한 책임감에 대해
자기를 드러내어야 하는 민망함과 진실성에 대해
부족함에서 오는 아쉬움과 더 나아지고 싶은 욕심에 대해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해석하는 '나'의 새로움에 대해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끝없이 놀라고 고뇌해야 하고, 
또 기뻐할 수 있는 창작자의 길로 들어선 것을
진심으로 환영!


이것저것 만들어 주변에 돌리기 일년여, 이번엔 처음부터 작정하고 주문을 받아보았다. 주로 어른들을 위한 것이고 추석이라 이전 간단한 포스팅에 올린 것처럼 사과, 밤, 호박 등의 가을스러운 재료를 테마로 잡았다. 거기에 초콜렛과 바나나 등으로 좀 더 달콤함을 추가. 저번 이벤트처럼 요고조고 들어간 박스로 할 것인가, 조각케익식으로 할까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여덟가지가 한조각씩 골고루 들어간 8종 케이크 세트로 결정.


막상 야심차게 여덟가지로 구상을 했지만, 맘 한켠에는 과연 가능할까, 라는 의구심이 약간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주문과 입금까지 받고 실제로 착수해야한다고 생각하니 그 의구심은 두려움으로 변하고, 새로이 도전하는 레시피도 있는데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거기다가 추석 하루이틀 전에만 배달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다들 일찍 휴가들을 내셔서 평일 저녁에 만들어야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점점 부담감은 커져갔지만, 뭐, 내가 일 벌여놓은 것. 숨 한번크게 쉬고 재료 장보기부터 시작!


케이크류가 여덟가지니 평소보다 재료는 어마어마했다. 달걀 서른개, 버터 큰 걸로 두덩이, 설탕 한푸대, 밀가루 한푸대. 거기 단호박 두덩이. 혼자 베이킹을 할때보다 선물용은 재료 고르는 것도 그만큼 더 신경이 쓰였다. 사과도 더 이쁜 것을 고르게 되고, 원산지도 그만큼 더 신경쓰게 되고. 


포장재료는 온라인으로 사려고 했으나, 추석연휴가 얼마남지 않은 상태에서 비상걸린 택배사들이 이틀안에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에 아침일찍 방산시장도 다녀왔다. 리스트를 만들어가 한 삼십분이면 쇼핑이 끝날줄 알았으나 웬걸, 막상 오프라인으로 가니 없는 것들도 많고 웬지 장사할 마음이 없어보이는 주인분들이 너무 많아 기분도 좀 상했다. 생각해 놓은 포장컨셉이 있는데 온라인서 찜해놓은 둥그런 박스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 예상외로 방산시장 바닥도 좀 헤메고 다니고......우여곡절 끝에 장보기를 끝내니 땀은 한바가지에 몸은 녹초.


집에와서 첫날은 우선 재료 계량부터 시작했다. 마른재료를 각각 따로 개량해 지퍼백에 스티커로 구분해 담아놓고 버터 등등도 나누고. 당근 갈은 것, 레몬껍질 및 사과 등 전처리가 필요한 재료들도 미리 준비해 놓고. 치즈케이크를 위한 녹차 제누와즈 굽고. 이렇게만 하는데도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회사 다녀와서 하려니 잠도 모자라서 졸린 눈으로 계량하는 바람에 막 흘려서 부엌도 난장판.


다음날은 머랭등을 내지 않아도 되는 조금 더 수월한 것들로 구웠다. 집안은 오븐온도로 점점 더워가고...설겆이 거리는 늘어가고...그래도 달콤한 냄새로 가득 찬 부엌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결국 찹쌀케이크까지 다섯판을 굽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팔 겉어부치고 세판을 마저 굽기전, 이미 완성된 아이들을 슬라이스 하는데, 끄악, 바나나 브레드 중앙이 전혀 익지를 않은 것이다. 더 예쁘게 한다고 바나나를 꽃아서 구웠는데, 중간에까지 꼽으니 습기때문에 익지 않은 것. 분명히 꼬치테스트 했을 때는 묻어나오질 않았는데 말이다 엉엉......

문제의 덜 익은 바나나 브레드. 얼핏 보면 커스타드 크림 같다.
이런 상태로 다시 오븐에 넣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븐에서 한 십여분 더 구워봤다. 그러니 익긴 있었는데, 역시 속살은 꾸덕꾸덕해지고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겉표면은 초콜렛처럼 확 진해져 버렸다. 바나나 일곱개에, 온갖 향신료와 유정란 등 재료등이 너무 아까웠고 짜증이 몰려왔다. 

이걸 새로 다시 구워야 하나? 조금 식혀서 먹어보니 먹을만은 했고, 여덟가지나 되니 한조각 별로라도 뭐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듯 했다. 통에 넣어두고 몇시간이 지난 후 먹어보니 좀 더 촉촉해졌을 때는 정말 갈등이 되었으나, 역시 내가 봤을 때 실패작인 이걸 아무렇지 않게 내보낼 수는 없었다. 임기학 셰프님이 셰프는 모든 과정에 떳떳하고 정직해야 한다, 라고 하신 인터뷰 내용이 떠오르며 결국 한판 새로 구웠다.


바나나 브레드 사건 말고는 그 어떤때보다 생각한만큼의 퀄리티가 나와주어서 매우 행복했다. 좀 더 긴장하고, 정성을 다하니 그만큼 손끝에서 실현이 되더라. 거기에다가 저번 이벤트 할 때 했던 여섯가지 이상의 더 많은 가짓수를 하면서 그만큼 더 멀티태스킹 능력도 키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고. 잘 포장해서 배달했을 때 즐거워 하는 내 첫 고객(?)들을 보며 느낀 그 뿌듯함이란 정말 이루 말할수 없었다.

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시길!


정말 많은 맛집, 요리 블로그들을 돌아보고 있노라면 하루 세끼를 아무리 잘 먹어도 으와 맛있겠네 침 삼키게 된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 웹서핑 잠깐 하다 잘못 걸리면 심각한 어택. 얼마전에도 이메일 잠깐 확인하다 친구가 알려준 링크를 가보니 젠장, 먹으러 여행 다니시는 분의 블로그. 숯불향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길거리 꼬치구이부터 필리핀에서 먹은 온갖 열대과일 사진까지. 한참 모니터에 얼굴박고 있엇다. 나도 요새 종종 지인들에게 듣는 투정, "니 블로그 가면 너무 배고파져. 밤에 절대 안가"

요새 그래서 방문자 수가 떨어졌나? 많이 좀 놀러와 주시고 추천도 꾹꾹 에헴에헴

그러나 사실 좀 더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족이다. 요새 영화관에서 찾아볼 수 있는 4D 영화처럼 냄새도 마구 풍기고, 비주얼도 단순히 사진이 아닌 3D. 예전에는 실력이 부족해 집에서의 시식용으로만 이것저것 만들어 봐서 가족들이 먹을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주로 선물과 판매용만 만들어 아버지 말마따나 "부스러기 떨어지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렇지만 역시 제일 고통스러운 건 바로 우리집 최고령(?) 주니군. 가족들이야 아무래도 요고조고 시식하게 되지만 평생 사료만 먹고 사람음식은 철저히 배제당해야 하는 주니에게 일부러 제공되는 부스러기는 없다. 그렇지만 큰 눈망울과 애처로운 낑낑댐을 무기로 점점 사람음식에 대한 영역을 넓혀가던 주니군, 이제는 내가 요리를 하고 있으면 뭐 떨어지는 거 없나, 하고 내 발 밑에서 서성거린다.

이번 추석선물용 케이크들을 만드느라 이틀동안 밤새 오븐을 돌려대었더니, 집안에 진동하는 향기들이 내가 맡기에도 대단했다. 바닐라, 바나나, 초콜렛 등 온갖 냄새를 퐁퐁 풍기니 부엌을 떠날 줄 모르는 주니. 나도 "어이 저리가"로 일관하며 팽팽한 신경전.

아버지가 시식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는 주니군. 애처롭다.


케이크들을 포장할 때 전부 슬라이스해서 넓은 테이블에 놓고 작업을 했는데, 그 앞에 앉아서 떠날 줄을 모르는 거다. 정말 뚫어져라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 그러나 몸매는 슈렉 포에버 꿈속의 고양이 몸매가 되어가고 있고...
 

이렇게 호시탐탐 이틀동안 기회만을 노리던 주니군, 결국 어제 내가 케이크들 늘어놓고 잠시 한눈판 사이에 한건 하셨다. 거실로 돌아오니 식탁위에 두 앞발을 걸치고 서 있는 녀석. "주니야!" 버럭했더니 얼른 꼬리를 내리고 자리를 비킨다. 식탁 위를 보니 윽, 케이크 반조각을 뚝딱. 그것도 어떻게 알고 단가 제일 비싼 단호박 치즈케이크로. 앞으로 점점 더 신경전은 거세지고 이 녀석의 목표는 높아질 듯!


아침에 방산시장 가려고 나서는데 배가 너무 고파서 뭐 있나 뒤지다가 잘 익은 바나나 발견. 오븐에서 뭘 구워낼 시간은 없고, 우유도 없고 해서 두유로 대체해 후다닥 팬케이크로 변신! 요새 팬케이크에 제대로 꽃힘.



이전에 해먹었을 때는 먹여야하는 패밀리멤버들 덕에 제대로 이쁘게 굽지도 못하고 시럽샷도 못찍어서 오늘은 파우더 슈거까지 솔솔 :D



바나나를 넣어서 한결 촉촉하고 달달하다. 레시피는 이전 팬케이크 레시피에 바나나 한개정도 으개서 넣어주고 두유는 그냥 동량으로 대체. 두유가 들어가면 아무래도 조금 더 뻑뻑하긴 하다만 부담없이 먹기엔 나쁘진 않음. 그럼 레시피 다시 한 번,

박력분 240g (중력분도 오케이)
베이킹파우더 2작은술
소금 1/2작은술
설탕 3큰술
달걀 2개
우유 1컵 (두유로 대체)
녹인 버터 3큰술
바나나 한개 으갠거 (장식은 맘대로)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소금과 설탕을 체친다.걀, 우유, 버터를 따로 잘 섞은 후 미리 체쳐놓은 가루류를 넣어 훌훌 섞어준다. 

그럼 오늘 날라리 사진 포스팅은 이만, 방산시장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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