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단상

사과와 양파, 감자. 서로 확연히 구분되는 이 재료들을 비슷한 크기로 썬 후 코를 막고 먹어보라. 그 확연하던 차이가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감기가 걸려 코가 심하게 막힌 경우 음식 맛을 느끼기가 어려운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바로 우리가 '맛'이라고 느끼는 감각의 70% 이상이 후각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어떤 음식을 먹기전에 아 맛있겠다, 혹은 윽 이상하군, 이라고 판단을 해 주는 감각은 미각이 아닌 후각이다. 아침일찍 빵집에 들어가니 달콤하고 구수한 냄새에 갑자기 배가 고파지거나, 음식이 상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냄새를 먼저 맡아본다던지 말이다. 두리안이나 초두부 같은 경우 냄새가 너무 역해 먹지 못하겠어도 맛있다는 사람들 말을 듣고 억지로 먹어보는 경우가 많다. 결국 음식에 관해서 혀보다 오히려 코가 일차적인 기관인 것이다.

와인이나 커피 전문가들도 마시기 전, 반드시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냄새들에 대한 차트(아로마휠, Aroma Wheel)가 따로 있을 정도로 후각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 점심을 먹은 도산공원 근처의 그라노(Grano)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이 냄새였다. 식전빵, 올리브 오일, 에피타이저부터 메인까지 접시가 내 앞에 놓이는 순간 진하게 풍겨오는 신선한 냄새들. 다른 레스토랑에서는 쉽사리 경험하지 못한 정도의 강렬함이었다. 입에 넣고 꼭꼭 씹을떄마다 더욱 더 진하게 올라오는 향기에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배부른 느낌이 들었다. 살짝 압도당한 내 후각과 미각을 위해 간간히 쉬어가며 먹어줌. 

에피타이저로 시킨 가지요리(상위사진)는 고소한 파마지아노 치즈와 토마토 소스가 부드러운 가지와 아낌없이 들어간 올리브오일과 어우려져 정말 진한 맛을 내었다. 이거 한가지만 시켜도 배불렀을 듯. 

내가 시킨 까르보나라는 아스파라거스를 갈아 소스에 넣고 정말 퍼펙트하게 익혀진 아삭한 아스파라거스가 몇줄기 들어가 있었다. 다만 트러플 오일이 나에게는 너무 강하게 느껴져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아무리 다른 종류의 소스를 먹어봐도 내 favorite은 토마토 소스. 좀 색다른 걸 찾는 분에게 추천한다.


또다른 파스타 디쉬였던 미트볼이 들어간 토마토 소스. 이거 정말 맛있었다. 펜넬씨가 들어간 미트볼은 부드러우면서도 씹는 맛이 좋았고, 토마토 소스는 상큼하면서도 녹진한 깊이가 느껴졌다. 두 파스타 모두 면은 처음 먹었을 때 어라, 이거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꼬들바삭꼬들한데 먹다보면 아주 약간 더 익어 입에 짝 붙는다. 단지 좀 억셌던 파슬리가 살짝 부드러웠음 더 좋았을 뻔.



그라노의 음식들은 한국식 파스타에 익숙해지신 분들에게는 조금은 너무 이국적이고 간이 짜다고 느껴질 듯. 진하고 풍미있는 이탈리안 음식이 땡길 때 아주 좋은 곳. 내가 이탈리안 음식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런 투박함과 단순하면서도 깊고 신선한 맛인데, 그걸 제대로 보여주는 레스토랑이다. 

게다가 완전히 오픈된 주방에서 러시아워의 활기와 살벌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우리 서버분도 참 친절하시고 차분하셔서 더욱 편한 식사. 가지요리에 배가 불러 파스타를 남긴 것이 너무너무 미안했음(포장해오긴 했다만 내일 상태가 어떨지는 흑흑...). 요리하는 사람에게 깨끗한 접시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 칭찬인지 잘 알기에 음식 맛있지만 배불러 남길때 진짜 죄책감 느낀다. 운동을 두배로 하는 수밖에?

그라노는 매일 정오부터 오픈하고 요리들 대부분 17,000원 이상. 여기에 10% 붙는다. 와인 리스트는 한잔 정도 먹을 수 있도록 글라스로도 판매하면 좋으련만, 전반적으로 센 값의 와인들이 대부분. 위치는 아래 지도 참조하시고 전화번호는 (02) 540-1330. 예약하면 더 편하게 먹겠지만 우리는 오늘 느지막히 가서 바로 앉았음. 야외에도 식탁이 있어 가을에 앉아 파스타 먹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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